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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의 한 청포도밭. 찌는 듯한 무더위에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던 이날도 포도 수확철을 맞이해 농부들은 덜 자라거나 벌레 먹은 열매를 솎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후끈한 날씨 탓에 그들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하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애지중지 키운 청포도를 지난달 초부터 오는 9월까지 운송비나 수수료 부담 없이 대량으로 도시로 보낼 수 있는 판로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포도농가에서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곳은 바로 SPC그룹이다. SPC그룹은 4년 전부터 산지 직거래 형태로 농가의 포도 판로 확보를 지원해왔는데 지난해 5월 영동군과 '영동 포도 공급 및 상생을 위한 협약'을 정식으로 체결하면서 생산농가와 기업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졌다. 이 협약은 생산농가는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기업은 품질 좋은 농작물을 공급해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자체는 세수가 늘게 돼 공유가치경영(CSV·Creating Shared Value)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약 2,000평 규모의 청포도밭을 가꾸는 농부 박세호(54)씨는 "개인 청과물 도매상에게 팔거나 서울 가락 농수산물 시장에 납품했던 예전에는 농협이 가져가는 출하 수수료가 있고 농민인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운송비도 있었다"며 "그러나 SPC와 직거래하면서 이 같은 운송비·수수료가 없어졌고 한 번에 여러 물량을 안정적으로 꾸준히 보낼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실제로 박씨는 포도를 팔아 손에 쥐는 이윤이 예전보다 10% 이상 늘었다.
매해 8월 초 강원도 화천지역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화천 토마토 축제'도 CSV의 좋은 사례다. 2003년부터 화천군이 오뚜기와 강원도, 안전행정부, 농림축산식품부 등과 함께하는 이 축제는 토마토 산지로서 화천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동시에 지역경제를 뛰게 하는 원동력으로 평가 받는다. 화천군에 따르면 토마토 축제를 포함한 군내 축제는 지난해 지역내총생산액(GRDP) 7,330억원 중 10%에 달한다. 방문 관광객만 연간 9만여명이다. 축제를 시작한 이래 지역경제를 이끄는 기반산업으로서 토마토 농업이 발전을 거듭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처럼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화천 토마토 축제'의 숨은 조력자는 다름 아닌 오뚜기다. 2004년부터 줄곧 후원업체였던 오뚜기는 축제의 흥을 돋우는 '1,000인의 스파게티'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화천농협에서 생산한 토마토는 오뚜기가 제조·판매하는 스파게티 소스와 케첩을 만드는 데 활용된다. 수매 규모만 연간 70여톤. 화천농협 관계자는 "화천 토마토를 오뚜기가 원재료로 사용하면서 지역과 특산물 홍보에 큰 도움이 되고 농가소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했다.
토마토가 오뚜기의 CSV를 상징하는 작물이라면 딸기는 CJ프레시웨이가 경남 산청군 농가와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데 한몫했다. CJ프레시웨이는 프랜차이즈 브랜드 '설빙'과 식자재 공급계약을 맺고 지난 3월부터 빙수용 딸기를 납품하고 있다. 인기 메뉴 '딸기설빙'에 들어가는 이 물량은 한 달 만에 7억5,000톤의 딸기를 소비하는 쾌거를 올렸다.
딸기가 CJ프레시웨이의 효자 상품이 된 계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CJ프레시웨이는 계열사인 CJ푸드빌의 뚜레쥬르 케이크에 들어가는 데코레이션용 딸기를 공급하기 위해 산청군과 인연을 맺었고 대기업을 통해 판매망을 확보한 군내 농가들(26곳)은 한데 뭉쳐 농업회사법인 '조이팜'을 설립했다. 납품계약을 꾸준히 이어나가겠다는 CJ프레시웨이의 약속은 조이팜 설립에 힘이 됐다. 조이팜에서 생산하는 딸기의 60%는 CJ프레시웨이를 거쳐 전국 방방곡곡에 판매된다. 연간 유통되는 규모는 500여톤에 이른다.
고추 산지로 유명한 경북 봉화군도 대기업과 지자체, 농민 3자 간 CSV 모델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곳이다. CJ프레시웨이는 지난해 9월 봉화군 고추농가와 계약재배를 맺고 군 전체 고추 수확량인 3,300여톤 가운데 9% 정도인 300여톤을 수매하기로 약속했다. 이 고추는 주로 CJ제일제당의 김치 브랜드 '하선정'과 장류 브랜드인 '해찬들' 제품 원료로 쓰이고 일부는 CJ프레시웨이의 급식업장에서 활용된다.
이 같은 3자 구도는 기업에 원가경쟁력을 보장하는 동시에 지자체에는 지역 특산물인 고추를 전국에 홍보할 기회를, 농가에는 소득증가라는 결과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 모델은 고추를 심고 수확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참여 기업과 농민, 지자체가 함께 관리해 소비자가 믿고 선택할 수 있는 작물을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CSV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동=김민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