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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직후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대표적 주전론자인 김상헌(1570~1652)은 청에 압송돼 선양(瀋陽)에 억류됐을 때 '문희별자도'라는 그림 한 폭을 얻었다. '문희가 아들과 헤어지다'란 뜻의 '문희별자도'는 중국 후한 말의 학자 채옹의 여식이자 뛰어난 문학가였던 채문희라는 여인이 흉노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다룬 그림이다. 포로로 끌려간 문희는 오랑캐의 자식을 낳아 키우며 12년을 보내다가 십 수년이 지나서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타지에서의 오랜 고생 끝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기쁨보다는 그곳에서 낳은 아들과의 생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문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유미나 원광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문희별자도'가 17세기 조선이 겪은 고통의 역사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1637년 병자호란과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에 이어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의 백성 50만여명이 포로로 끌려 갔다고 한다. 잡혀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버림 받으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미국 스미스 대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원나라 화백 조맹부의 '문희별자도'와 고종이 주문해 이당이 그렸다는 '호가십팔박'(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은 문희는 물론 문희와 닮은 꼴인 조선 여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32명이 옛 그림 속에서 인문학 등 한국학의 정수(精髓)를 살펴본 책이다. 2년 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를 쓴 필진이 다시 뭉쳐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 각지의 도면(圖面) 230여 개를 분석해 다시 책을 펴냈다. 저자들이 다루는 내용에 따라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5개의 큰 주제로 나눠서 그림에 담긴 의미를 소개했다.
'마음: 그림, 가슴을 열다' 편에서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참혹함과 처절한 외로움을 그림으로 달랜 사도세자의 그림을 다뤘다. 그가 그린 '개 그림' 속에는 왕자의 아픔과 절규, 왕실의 애환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구도다.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신윤복의 부친 신한평이 그린 '자모육아'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이 물씬 느껴진다. 화면 속 어린 아기는 젖을 물고 있고, 오른 손으로는 다른 젖을 만지고 있다. 어머니 오른 쪽에서 울고 서 있는 형은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긴 것을 투정하는 듯한 표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이가 가장 많은 누나는 이 제 다 컸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놀고 있다. '표상: 그림이 감싸 안은 국가' 편에서는 한반도의 형상과 관련한 논의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즉 한반도의 윤곽 안에 무엇을 그려 넣느냐라는 문제는 단순히 그림을 해석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 식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모습을 중국을 향해 고개 숙여 절하는 노인의 형상으로 인식했다. 신라 말 도선대사는 우리나라의 땅을 대륙에 정박한 배의 형국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 침략기 때 도쿄제국대의 고토분지로가 한반도의 형상을 토끼 모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됐다. 이후 최남선은 대륙을 향해 할퀴며 달려드는 듯한 호랑이 지도를 선보인 것을 계기로 다양한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지도'가 선보였다.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한반도 지도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족의식과 정체성 문제에 맞물린 일종의 담론을 형성해왔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인문학자 32인이 보석처럼 추리고 선별해 이야기로 구성한 이 책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 3국의 수준 높은 옛 그림을 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역사와 문학, 철학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3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