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독일식 경제모델을 도입하자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경제의 침체가 이어지자 상대적으로 선방 중인 독일식 경제구조를 모방해 위기에서 탈출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모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집권 보수당과 좌파인 야당 모두 제조업ㆍ중소기업 육성, 수출 촉진, 기술 혁신 등을 유도하며 독일 모델 벤치마킹을 본격화하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 패전을 주도하며 독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영국이 70여년 만에 독일을 본받자고 나서면서 독일 모델이 전 세계로 확산될 지 주목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도 최근 우리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며 기존 경제 모델의 한계가 드러나자 지난 대선 국면부터 독일식 경제모델을 적극 모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위기 이후 희비 엇갈린 양국= 영국이 독일 벤치마킹에 적극 나선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침체에 허덕이는 자국 경제와 달리 선방하고 있는 독일에 자극 받은 탓이다. 특히 제조업이 취약한 가운데 금융업에 과도하게 치우친 게 위기 극복의 장애물로 보고 있다.
지난 2007년까지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거의 매년 독일을 상회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지난해까지 2009년 한 해를 제외하면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영국이 경제 대부분을 금융업에 의존하다 보니 금융위기에 크게 휘청거린 반면 독일은 탄탄한 제조업 기반에 힘입어 위기를 비교적 잘 넘겼기 때문이다.
실업률을 보면 이 같은 현상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의 실업률은 5% 내외를 유지했으나 독일은 최대 11%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이런 현상은 뒤바뀌기 시작해 영국의 실업률은 8%대까지 치솟은 반면 독일의 실업률은 5%대로 안정됐다.
◇영국, 제조업ㆍ중소기업 살리기= 이 같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우선 독일처럼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기 위해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금융 산업의 비중이 너무 높아 금융위기 때마다 경제 전반이 충격을 받는 만큼 독일처럼 제조업이라는 안전판을 구축할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영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11%로 지난 1980년대의 25%에서 크게 하락했다. 반면 독일은 제조업 비중이 GDP의 21%로 영국의 두 배에 가깝다.
특히 영국은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보증하는 기업은행 출범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빈스 케이블 산업장관이 발표해 이르면 오는 9월 출범 예정인 이 은행은 기존 은행으로부터 원활한 자금 공급을 받지 못하는 제조업 분야 중소기업들을 주로 지원할 예정이다.
한마디로 독일 KFW은행 모델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독일 국영은행인 KFW은행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돼 중소기업과 신생기업 대출을 주요 업무로 삼고 있다. 케이블 장관은 지난해 5월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KFW를 방문하기도 했다.
나아가 영국은 기업은행을 내세워 제조업은 물론 다른 부문의 중소기업에도 대출 혜택을 줘 전체 중소기업을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영국 재계가 독일경제의 근간인 미텔슈탄트(mittelstandㆍ중소기업)의 영국 버전이 나와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며 "기업은행 설립은 이 같은 작업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독일 중소기업은 전체 고용의 70%를 전담하고 국가 순부가가치의 47.3%를 차지하는 등 독일 경제의 핵심이다. 국가 경제 전체가 소수의 대기업에 기대고 있는 경제구조에 비해 안정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영국은 기술혁신 분야에서도 정부 지원 기구인 캐타펄트 기술센터를 건립, 기업인과 연구원이 함께 일하며 기술 혁신을 도모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 역시 과거 MP3 디지털 음악 포맷을 만들어 유명한 독일의 프라운호페르 기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또한 영국 재무부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주정부가 수출 기업을 대상으로 신용보증을 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이 계속해서 해오던 것이라고 FT는 지적했다.
◇여론조사 1위 야당, 독일 모방에 더 호전적= 현재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야당인 노동당은 독일식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데 집권당보다 더 적극적이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노동당 당수는 최근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독일식 저축은행(스파카센)의 영국판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스파카센은 독일 지방정부가 주주로 참여하는 저축은행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가 목적이다.
또한 노동당 내에서는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이는 직원이 2,000명 이상인 기업에서 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자 대표로 뽑아야 하는 제도다. 실제 이행된다면 소수의 경영진과 자본이 좌우하는 영국의 기업 문화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2015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이 같은 제도를 도입할 경우 산업혁명 이후 영국식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퇴락하고 사회보장과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결합한 독일식 모델이 득세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소수의 경영자와 자본 중심 경제체제의 원조 격인 영국이 다수의 노동자와 복지체계를 중시하는 경제모델로 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