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국경제와 '뫼비우스의 띠'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는 어디에 있을까.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라는 입체이다. 지난 1865년 이 같은 이치를 처음 발견한 독일 수학자의 이름을 따서 등장한 '뫼비우스의 띠'는 모든 것에 안과 밖의 구별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흑백론을 반대하고 보다 유연한 사고체계를 설명하는데도 이 ‘뫼비우스의 띠’가 응용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결국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다는 통합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활 곳곳에 '양극화 망령'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양극화이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잘되는 회사와 안되는 회사, 잘되는 업종과 안되는 업종 등등. 모든 것이 둘로 나뉘고 있다. 경제가 아무리 성장을 해도 그늘진 곳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구조에 우리가 익숙해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극화는 이제 운명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언제부터 그런 일이 시작됐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그렇게 계속될 것인지, 누구도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줄기차게 사회적인 이슈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요즘 우리들의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양극화’라는 망령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최근 소득 최상위와 최하위 계층의 교양ㆍ오락 지출비 차이가 10배나 늘어났다는 소식이다. 문화ㆍ여가 생활을 즐기는데도 빈부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애기인데 결코 즐거운 소식은 아니다. 미흡하나마 경제는 성장하고 있는데도 지난 3ㆍ4분기 우리 국민의 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부문과 절대 성장하지 못하는 부문이 우리 사회에 어지럽게 섞여 있음을 반증하는 수치들이다. 양극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둘로 나뉜다. 그곳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발견하기 어렵다. 양극화가 우리의 운명처럼 된 데는 ‘세계화’도 큰 역할을 했다. 삼성ㆍ현대차ㆍLG 등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그들의 고객은 우리나라 국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뻗쳐 있다. 바로 그것이 세계화이다. 필요 부품도 우리나라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보다 싸고 보다 우수한 부품을 제공하는 회사라면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삼성 등이 아무리 잘돼도 그 온기가 방방곡곡에 두루 퍼져나가기가 어려운 구조가 됐다. 그 같은 상황에서 세계시장과의 연결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영세상인들이나 중소기업들은 국내에서 작은 피자 조각이나마 얻어 먹으려고 피튀기는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어찌 잘살 수 있을 것인가. 또 돈 많은 사람들에게 자꾸 눈치를 주고 골프 같은 것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인 운동으로 배척받고 있는 상황에서 돈 있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 여가활동을 즐기는 상황이다. 일이 그런 식으로 풀리면 돈이 국내에서 퍼져 나갈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고 보니 제조업만이 아니라 레저ㆍ문화 활동은 물론 교육 역시 세계화 추세에 따르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 원망하기보다 활용해야 그러나 돈 있는 곳, 돈 되는 곳을 혐오하고 타박하면 할수록 돈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더 심해진다. 우리 기업들이 외국으로 나간다고 원망만 할 게 아니라 외국 기업들을 적극 끌어들이면 될 일이고 교육 때문에 밖으로 떠도는 풍조를 원망할 게 아니라 외국인들을 우리나라 교육기관에 더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설령 세계화를 양극화의 원흉으로 인정한다 해도 세계화를 원망하는 이데올로기를 퍼트린다고 해서 가난한 곳에 온기를 불어넣지는 못할 것이다. 세계화가 운명이라고 해서 양극화까지 우리의 운명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양극화를 설명하는 데는 모두가 시각을 같이 한다 해도 그것을 해결하는 이슈로 이어지면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양 극단의 이념싸움에 내몰린다는 현실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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