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속에 핀 '신앙의 꽃'… 아픔 서린 순교의 흔적 고스란히

교황 방문하는 천주교 솔뫼·해미성지
솔뫼, '신앙의 못자리' 김대건 신부 생가엔 수백년 소나무 숲이 슬픔 곱씹는 듯
해미, 이름모를 신자들 피로 물든 읍성… 잔혹했던 생매장의 역사 생생

우리나라 현존 읍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은 내포 지역의 동학운동, 한말의 의병 활동, 천주교 박해 등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당진시 우강면에 자리한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1822~1846)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대한민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해미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0년 박해 기간 동안 해미에서는 수천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떠밀려 생매장당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드나들었던 이수광이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예수회 소속의 이탈리아 신부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중우론' 등을 소개한 것을 그 시발로 보기 때문이다. 이수광과 동시대 사람인 허균도 베이징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다.

이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1700년대, 성호 이익 등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일며 안정복·권철신·권일신·정약전·정약종·정약용·이벽·이승훈 등을 통해 잠시 세를 확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천주교는 집권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고난과 순교의 길을 반복하는 부침을 겪었다. 천주교가 박해에서 벗어나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의 일이다.

1989년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25년 만에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 천주교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교황은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성지, 서산시 해미성지 등을 찾을 예정이다. 이번주 나들이에서는 교황의 방한을 즈음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예정인 충청남도 일대의 천주교 성지를 살펴봤다.

◇솔뫼성지=당진시 우강면에 자리한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1822~1846)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대한민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솔뫼성지에서 솔뫼라는 이름은 울창한 소나무숲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50세에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가 전래된 곳이다. 이후 김진후는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해미감옥에서 10여년간의 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김진후 순교 이후 2년 뒤에 그이 셋째 아들 김한현, 다시 23년 뒤에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 다시 7년 뒤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이곳이 '신앙의 못자리'라고 불리는 이유는 32년간 4대에 걸쳐 순교자가 이어진 처절한 역사 때문이다.

솔뫼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김대건 신부가 살았던 옛집이 복원돼 이곳을 찾는 객을 맞고 있다. 입구에서 왼편 언덕으로 오르면 소나무 숲 안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수령이 200~300년가량인 소나무들은 순교의 슬픔을 곱씹기라도 하는 듯 김대건의 동상을 에워싸고 굽어보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붉은색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김대건기념관이자 성당이다. 기념관에는 충청도 지방 가톨릭 역사와 김대건 신부의 유품과 유골을 전시해놓고 있다.

■주변 볼거리

삽교호함상공원(041-363-6960), 왜목마을

■ 맛집

태공수산(간재미, 041-353-6544), 해안선횟집(활어회, 041-353-6757)

소들강문(버그네순례길향토밥상, 041-363-9494), 길목식당(한식, 041-363-5505)

◇해미순교성지=해미읍성은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충청도 서해안 방어를 위해 세워진 성에는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고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 동안 천주교도를 처형한 옥사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대박해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해미성지다. 박해 때뿐 아니라 해미읍성에선 지속적으로 충청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였다. 읍성 내의 감옥터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을 매달아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 가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해미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0년 박해 기간 동안 해미에서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떠밀려 생매장당했다. 이 기간 해미읍성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해미읍성과 순교지를 둘러보았다면 생매장 순교성지라 명명된 여숫골에 들르는 것도 좋다. 이곳은 해미천 좌우 주변으로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1,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해미순교성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은 1985년 해미본당 설립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제는 단장을 마치고 천주교 신자들과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8년)에 기존 예산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도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의 이전으로 조성된 해미읍성은 원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였다. 헌종 13년 개축 이후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춘 해미읍성은 면적이 19만4,102㎡이며 둘레는 약 2㎞에 이른다. 읍성에는 동문과 서문·동헌·어사·교련청·작청·사령청 등의 건물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 현존 읍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은 내포 지역의 동학운동, 한말의 의병 활동, 천주교 박해 등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루하루가 역사의 더께처럼 쌓여 있는 곳이 바로 해미읍성이다.

■주변 볼거리

서산 마애삼존불상(041-660-2538), 개심사(041-688-2633), 간월암(041-668-6624)

마늘각시(한정식, 041-663-8283)

■ 맛집

읍성뚝배기(소머리곰탕, 041-688-2101), 진국집(게국지백반, 041-665-7091), 명성식당(꽃게장, 041-665-2981), 토담골(우럭젓국, 041-669-5547)

/당진=우현석객원기자, 사진제공=충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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