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수필] 김회장의 안경

대우의 김우중회장을 그룹 안에서는 「안경」이라 부른다. 유난히도 굵고 커다란 검은 테 안경을 낀 얼굴에서 그런 별호가 붙은 것이겠지만 상징성도 숨어 있을 듯싶다. 비즈니스 세계와 시류의 흐름을 판독해 내는 눈이 그만큼 빠른 오너도 드물다.수출 드라이브로 국가 경제가 매진했던 시절 그는 세계시장을 누비며 올 라운드 플레이로 대우를 재계 톱 그룹에 올려놓았다. 창업시대 그의 「안경」이 먼저 포착했던 것은 금융이었다. 금융가에서는 J은행을 공략했던 일화가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부격으로 그의 강력한 지원자였다. 수많은 기업들을 인수하여 기업영토를 확장한 이면에는 권력의 엄호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가리켜 「머천트(상인)」라기 보다는 「엔터프레뉴어(창업가)」라 불러주기를 희망한다. 인수· 합병이 대우의 성장사라 할지라도 샐러리맨으로 출발하여 재계 정상에 오른 궤적 자체를 스스로 「창조」라고 보는 인식에 근거한 것 같다. 이미 여러해 전부터 그의 「안경」은 세계화의 조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약 200억달러의 돈을 퍼부어 기업의 해외 영토를 확장했다. 동유럽에는 대우의 간판이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다. 3년 전, 폴란드 인민대궁전 건물을 온통 뒤덮고 있던 대우의 깃발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리던 무대에서 합작회사의 경진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김회장은 남산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언론재단 모임에서 한국경제의 위기론을 피력하며 이제는 세계화의 길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러던 그가 이른바 구조조정 압력으로 핀치에 몰려 있다. 세계화를 가장 앞장 서 부르짖고 금융의 귀재라 일컬어지던 그가 세계화와 금융구조 개혁이라는 덫에 걸린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김회장의 「안경」이 무엇을 잘 못 본 것인가. 그의 세계화란 항간에서 얘기하듯 국내의 한계와 위기를 느껴「사업망명」을 기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다. 귀책사유라면 눈은 세계로 향했지만 「한국식 해결법」에 매달려 있었던 데 있지 않았나 본다. 김회장은 언제부터인가 안경을 바꿔 끼고 있다. 테없는 안경이다. 시야가 맑고 더 넓어 졌을 것 같다. 누군가 「회장님, 시대가 달라졌습니다.」라고 했다지만 「달라지게 돼 있는」세상을 제대로 읽어 냈으면 싶다. 「부채 위의 성장학」은 이제 수명이 다했다. /孫光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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