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들려오는 이라크ㆍ중동 관련 소식들이 혼란스럽다.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보다 오히려 미국 우방 국가들간의 논란이 빚어지는 등 최근 상황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최근 미국의 오랜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 '가장 위험한 적국이자 악의 핵(kernel of evil)'이라는 내용을 담은 미 국방부 정책자문위원단의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은 이 같은 내용이 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니라며 일단 발을 뺐지만 적극적인 반대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미 국방부 내에서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수십년간 이행돼온 국제법을 되돌려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ㆍ가자지구와 시나이사막까지 점령했던 지난 67년 6일 전쟁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현재의 정치현실을 볼 때 점령지를 둘러싼 뚜렷한 협상결과가 없이는 이 지역의 평화가 정착되기 어렵다. 이는 상당 부분 미국의 몫이다.
중동문제를 둘러싼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유럽과 아랍권 내 미국의 우방들에게 미국에 대한 불신을 더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부시정권의 무조건적인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지지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또 이라크 정권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력사용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아랍권에서는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통제하겠다는 명목 하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구미에 맞도록 중동지역을 재편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미국의 매파 정치인들은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같은 이유를 들어 이라크 공격을 주장해왔다. 이라크 공격을 통해 후세인의 대량 살상무기 사용을 억제할 뿐 아니라 미국의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현격히 줄일 수 있다는 것.
또 이란을 미국의 통제권 안에 편입시키고 시리아에까지 압력을 가하는 등 부수효과가 상당하다는 계산이다.
이는 실로 무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절도 있는 온건한 전략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에서는 중동지역의 커다란 동요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이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미국의 부시정권은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아랍동맹을 분열시키겠다는 바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은 미국의 대중동 정책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더욱 큰 의혹을 주게 될 뿐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