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 강남 지점에서 근무하는 한 프라이빗뱅커(PB)는 한 달 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쉬움에 무릎을 친다. 홍대 인근에서 56억원 상당의 상가 건물 매물이 나오자마자 즉시 고객에게 연락하고 이틀 뒤 계약을 체결하려 했지만 하루 사이에 건물이 팔린 것. 그는 "감정이나 상권 분석 등을 위해 최소 며칠이 걸리는 50억원대 물건이 하루 만에 팔린 것은 이례적"이라며 "가격이 수십억대에 달하더라도 물건이 좋다고 판단되면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정기예금 금리가 2% 초반으로 떨어지고 수신 시장이 격변하면서 자산가들의 움직임도 부쩍 빨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부동산 시장을 기웃하고 있지만 정부가 추가적인 경기 부양책을 내놓을 수 있다고 보고 수십억에서 수백억에 달하는 유동자금을 바탕으로 상황을 더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부동산과 관련한 양도세나 취득세 감면 등의 추가 조치를 기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부동산 시장에 온기가 흐르고 있지만 자산가들의 움직임에 따라서는 추가 상승을 견인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금융사의 수신 시장도 더 요동칠 수 있다는 뜻이다.
◇수신 시장 격변에 부동산 기웃…"추가 부양책 나오지 않겠나"=유흥영 신한 PWM 파이낸스센터 PB팀장은 "일부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정부가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 및 서울시내 아파트 재건축 연한 축소에 이은 새로운 부동산 부양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며 "이들은 정기예금 만기일을 1년 단위로 묻어두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생각하는 특정 날짜를 지정하는 방식으로 자금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한 PWM 파이낸스센터 팀은 부동산에 관심을 갖는 자산가가 지난해에 비해 5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민성 KB국민은행 강남센터 PB는 "자산가들은 '초이노믹스' 이후 유동자산이 부동산으로 흘러가야 할 타이밍이라 판단하는 듯하다"며 "다만 정부의 추가 부양책을 기대해서인지 실질 계약보다는 대기 수요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중은행 PB 들에 따르면 자산가들은 이미 강남역 인근은 가격이 너무 올라 투자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반면 이태원이나 홍대 인근, 연남동 등은 아직 추가적인 가치 상승 여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역세권에 자리한 20~50억대 건물을 선호하고 상가 임대료로 정기예금보다 2~3%포인트 높은 수익을 기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역세권에 있는 빌딩과 같이 가치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물건은 2~3일 내에 매매가 성사되는 상황이다. 윤청우 하나은행 압구정센터 PB 팀장은 "PB센터에서 관리하는 개인 고객의 95%는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었다고 할 정도로 부동산에 대한 자산가들의 수요는 항상 있어왔다"며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움직임과 임대 소득을 통해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려는 동향이 함께 보인다"고 밝혔다.
자산가들은 일반적 예상과 달리 최근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이끌고 있는 아파트 재건축 시장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시중은행 강남PB 센터의 박모 팀장은 "강남 자산가들은 이미 재건축 후보군에 들어 있는 아파트 한두채씩은 대부분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이미 오를 대로 올라 있기 때문에 자산가들의 추가적인 투자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가 금리 인하 기대=PB들에 따르면 자산가 대부분은 금리가 더욱 내려갈 것으로 보고 있다. 윤희숙 신한 PWM분당센터 PB 팀장은 "8월 기준금리를 내린 것이 타이밍이 늦었다고 판단하는 자산가들이 대부분"이라며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늦게 내린 만큼 저금리 기조가 더 유지될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대출 금리를 내리라는 정부 압박이 계속되는 만큼 추가 인하 여지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밝혔다. 권현희 우리은행 강남센터 PB 팀장 또한 "금리가 더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으며 이런 기조가 꽤 이어질 것으로 보는 자산가가 다수"라고 말했다.
다만 자산가들은 정부가 주가 상승과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둘 모두를 잃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유 팀장은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경기부양책과 관련한 카드를 모두 다 쓴 후에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다"며 "이 때문에 아직 본격적으로 투자에 나서기는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