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은 아주 복잡한 심리구조를 만들어낸다. 특히 젊은 실업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실업자 이뽀(이뽈리트 지라르도)는 에릭 로생 감독의 데뷔작 「동정없는 세상」에서 사랑에 미치기로 한다.
하지만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이뽀의 사랑 이야기를 실업자의 푸념으로만 치부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뽀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실업자의 길을 택하는 남자와 실업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뽀는 나탈리(미레이유 페리에)를 사랑하면서 격정 속에서 혼돈을 느끼는데 20대가 아니면 외칠수 없는 말들을 쉴새없이 뱉어낸다.
『이봐 나는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사랑하는 놈 부탁 하나 못들어준단 말이야』
이뽀의 수다스런 사랑 이야기 「동정없는 세상」이 만들어진지 9년만에 한국에 소개된다. 젊은 청춘은 물론이고 사랑이라는 말을 잊어버린 낡은 세대들도 함께 사랑이라는 말에 흥분을 느낄수 있는 영화이다.
80년대말 프랑스 파리는 유럽통합이라는 세기적인 사건 속에서도 경제는 엉망이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생활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오일쇼크 때를 능가할 것처럼 경제는 휘청거렸고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실거렸다.
이뽀는 능력있는 실업자, 세상을 비웃는 젊은이다. 명석한 두뇌로 대학입학에는 성공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생인 동생에게 얹혀사는 길을 택한다. 그것도 마약밀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동생 곁에서.
훤칠한 키, 상대방의 마음을 흔드는 절묘한 미소, 솔직한 언변으로 무장한 이뽀는 여성의 마음을 빼앗는 일이 길거리의 돌맹이를 줍는 것 보다 쉽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그만큼 버리기도 쉬운 법. 그에게 여자는 언제나 일회용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난 여인 나탈리가 그의 마음을 휘젓고 태우는 불씨가 된다. 명문대학의 뛰어난 우등생이고 러시아어 총시통역사이기도 한 능력있는 여자 나탈리에게 이뽀는 무례하지만 거짓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당장 통역을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여자에게 자신만을 생각해달라고 요구하는 이뽀, 미래가 불안하다고 말하는 여인에게 지금 사랑 이외에 무엇을 생각할 틈이 있느냐고 다그치는 이뽀.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현실은 더욱 무거운 중량감으로 다가온다. 마침내 미국 MIT대학에 1년 강사자리를 제의받아 같이 떠나자는 나탈리의 제안에 갈등을 느끼다가 백수건달이라도 좋으니 미국으로 함께 가려고 결심하는 이뽀에게서 관객은 그의 사랑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우연의 사건 하나를 준비해 두고 있어 그들의 운명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미지수로 남게된다.
잿빛 도시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불같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젊은 청춘의 이야기 「동정없는 세상」은 제46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24일 서울 코아아트홀, 동숭 시네마텍등에서 개봉.【이용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