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업체를 운영하는 K사장은 지난 7월 컨설팅회사를 찾았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등 탈출구를 찾아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K사장은 결국 회사문을 닫는 것이 주주들을 위해서 좋을 것이라고 판단해 컨설팅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10억원 가량의 자본금이 있었지만 회사경영실적이 악화되고 있었고 부실도 심했습니다.친구권유로 폐업컨설팅을 받았는데 자본금을 10대 1로 줄이고(감자), 자본금 1억원은 주주비율대로 출자금을 나눠줬습니다. 한푼도 못 건진다고 생각한 주주들은 일부 금액을 회수할 수 있었고, 저도 마음의 빚을 일부나마 덜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기계금속 업체인 S사 L사장은 기업정리 컨설팅을 받고 직원들의 일자리를 유지시켜 준 케이스. 그는 부실경영에 휘말리면서 직원들을 모두 정리할 계획이었지만 회계사의 조언을 듣고 직원들에게 주식과 함께 경영권을 모두 넘겨주었다. 대신 이익의 일정액이나 배당금을 받기로 직원들과 합의했다. 직원들은 회사를 살릴 수 있었고, L사장은 주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윈윈(Win Win)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사청산을 앞두고 폐업컨설팅을 받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생산설비와 특허권 등 회사재산을 헐값에 팔아치우기 보다는 회계전문가, 고급컨설턴트들의 도움을 받아 깔끔하게 회사를 정리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폐업컨설팅 인기 이유=S컨설팅 관계자는 “수익모델을 찾지 못하는 한계기업뿐 아니라 일반 중소벤처 기업들의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는 앞으로 경기전망이 불투명한데다 더 망가지기 전에 있는 재산이라도 찾고 보자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 컨설팅사의 경우 이전에는 주로 창업과 기업공개 컨설팅을 담당했지만 올 하반기 별도의 폐업컨설팅 팀을 만들고 5명의 인원을 배정해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는 중소기업들이 잇따른 파업과 인력난, 자금난 등으로 경영환경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고, 향후 전망도 극히 불투명해 회사를 접는 것이 오히려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 올들어 신설법인과 부도법인 비율은 3월 18.8배로 높았지만 이후 내림세로 돌아서 6월 15.4배, 8월 12.1배로 떨어졌고 9월에는 10.1배로 곤두박질쳤다. 신설법인 설립이 주춤한 반면 부도나 도산으로 문을 닫는 기업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K법무법인 관계자는 “현 경영상황이 지속된다면 중소기업의 65% 가량이 3년 이내에 회사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회계나 주식, 자산감정 등에 문외한인 중소벤처 기업들이 청산에 앞서 회사 제값 받기 차원에서 문의를 해오고 있다”며 “품질경영이나 경영혁신, 창업 등에 이어 새로운 컨설팅분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도덕적해이 현상도 나타나=폐업컨설팅을 찾는 기업주 중 일부는 청산에 앞서 회사자산을 개인돈으로 유용하거나 직원들을 정리하는 도구로 악용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금형업체인 H사 B사장이 대표적인 경우. B사장은 직원들 월급이 몇달째 밀려있을 정도로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있다. 하지만 악덕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아 직원들 몰래 현물출자 형식으로 중국에 공장을 만들었다. 기계설비 등 유형자산은 중국으로 넘어가고 국내에는 폐물 기계들 뿐이다. 자연스럽게 국내에서 회사를 청산하는 한편 중국에서는 차명으로 회사를 다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빼낼 수 있는 회사 자산은 모두 빼내고 남은 빈 껍질만 덩핑으로 넘긴 셈이다.
대형 벤처캐피털 회사의 관계자는 “창투사가 출자한 중소벤처기업의 50% 가량은 이미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으며, 경기불황이 지속될 경우 기업청산과 폐업은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하지만 일부 기업의 경우 청산에 앞서 부정한 짓을 하고 있어 회사가치가 떨어지고 직원들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서정명기자 vicsj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