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로 유명세를 떨친 정지우 감독의 데뷔작인 「해피엔드」와 「넘버3」로 널리 알려진 송능한 감독의 두번째 작품인 「세기말」이 그것이다.우선 「해피엔드」는 불륜에 빠진 여자 최보라(전도연), 은행원으로 일하다 실직해 집안에 들어앉은 그의 남편 서민기(최민식), 첫사랑 보라를 다시 만나 소유욕에 집착하는 웹 디자이너 김일범(주진모), 이들 세 남녀의 얽히고설킨 애증을 그린 치정극이다. 그 속에서 서로 다른 「해피엔드」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릴러풍 멜로 스타일로 그려낸다.
극은 롱컷과 숏컷으로 잡은 보라와 일범의 농염한 정사장면으로 시작된다. 보라가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빠져들면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남편 민기는 헌책방과 집을 오가며 그야말로 지루한, 그러나 별 불만없이 일상을 반복한다.
그러나 보라는 옛애인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남편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그를 통해 충족시키고 있을뿐이다.
반면 첫사랑의 추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범은 보라와의 재회를 계기로 영원히 자기 옆에 그녀를 붙잡아두려는 욕구에 빠져든다.
그런 일범의 허황된 욕심을 타이르기 위해 아기에게 수면제를 탄 분유를 먹인뒤 보라가 외출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민기가 끝까지 분노를 삭이고 치밀한 복수극을 준비하면서 영화는 반전한다.
이 영화는 IMF(국제통화기금) 한파로 실업이 사회문제화한 가운데 가족이 해체되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한편 「세기말」은 뉴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세기말」을 화두로 삼아 어수선한 현실세태를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는 사회비판극이다.
영화는 「모라토리엄」, 「무도덕」, 「모랄해저드」, 「Y2K」 등 4개의 챕터로 구성돼 각각의 시나리오가 전개된다.
「모라토리엄」 챕터에서는 멜로드라마 한편을 쓰기 위해 쩔쩔매는 시나리오작가 두섭(김갑수)과 영화사 기획실장인 서실장(류태호)이 드라마를 「탄생」시키려고 끊임없이 티격태격한다. 창작의욕이 살아나지 않는 멜로물에 매달려 연신 투덜거리는 두섭은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일을 어쩔수 없이 해나가는 현대인의 표상으로 그려져 있다.
「무도덕」 챕터는 50대의 천민 부르조아 천(이호재)과 철거민촌의 딸로 대학생인
소령(이재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천은 소령과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 식물인간인 아버지와 고시공부를 하는 오빠를 원조교제로 번 돈으로 뒷바라지는 소령은 자신의 21번째 생일에 친구 소개로 만난 천의 아들 현일과 어울려 놀다 마약에 빠져든다. 아버지의 재력으로 향락적인 삶을 살던 현일은 결국 요요 사내(안석환)로부터
망치에 얻어 맞아 죽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요 사내가 망치로 현일을 내려치는장면에는 「쓰레기」같은 인간들에 대한 「응징」과 같은 메시지가 함축돼 있어 보인다.
「모랄해저드」에서는 대학 시간강사로 극단적인 허무주의자인 상우(차승원)의 일
상을 그리고 있다. 강의도 우리 「애비」들의 잘못으로 실패한 한국 100년을 시니컬하게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교수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느 「속물」과 다름없다. 외도를 즐기는 바람둥이인 그는 끝내 부인의 고소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마지막 챕터 「Y2K」에서는 작가를 포기하고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두섭과 서실장이 다시 등장해 새작품 구상과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새천년에 여전히 쓰레기더미에서 마약을 주사하는 소령과 간통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상우의 모습이 오버랩되는와중에 두섭은 『답답하지, 내가 이 세상을 바꿀 힘은 없구. 그렇다구 이 세상이 바뀔 기미는 더구나 없구. 그래두 희망을 갖자. 희망은 사람들한테 있는거라구 그랬거든』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