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틀 안에서만 움직이면 반드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 구조조정에 잔뼈가 굵은 금융계의 한 전직 고위관계자가 최근 사석에서 던진 말이다. 새 정부 들어 기업 구조조정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결국 피해가 더욱 커지는 현상에 대한 진단이었다. 그는 웅진ㆍSTXㆍ동양 등 최근 이어진 굵직굵직한 기업 구조조정 사례를 언급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큰 기업의 구조조정을 성공하려면 정부와 금융권 모두 깊숙이 울타리를 깨고 들어가 도울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한데 그런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채권은행이 기존 틀을 확 버리고 구조조정의 새로운 틀을 처음부터 그리던지, 아니면 구조조정에 필요한 정책적 판단을 정부로부터 얻어내던지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와대와 금융 당국, 채권은행 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선제적인 구조조정이 가능하고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지난 29일 산업은행 국정감사에서 화제는 단연 청와대 서별관회의였다. 동양그룹 사태의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 이 회의에는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 조원동 경제수석, 신제윤 금융위원장,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 등 국내 경제와 금융을 총괄하는 수장들이 모인 것으로 전해진다. 여야 의원들은 홍 회장에게 이번 회동의 배경과 논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동양 사태를 청와대와 금융 당국이 사전에 알고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부터 실제 동양에 대한 자금 지원을 검토했다가 무산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이번 국감에서 어느 의혹도 말끔하게 해소된 것은 없었다.
그 대신 분명히 확인된 사실도 있다. 새 정부 들어 청와대나 금융 당국, 채권은행 누구 하나도 기존의 틀을 깨는 구조조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큰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필수인 세 주체 간 의사소통은 거의 낙제 수준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괜히 먼저 나섰다가 잘못됐을 경우 돌아올 책임 추궁이 무서웠을까. 동양 사태를 청와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금융위원장, 회동 사실 자체를 숨기려 했던 금감원장, 원리 원칙만을 따지는 산업은행장, 그리고 이들 뒤에 숨어서 사태를 관망하는 청와대를 보고 있으니 그 전직 금융계 고위관계자가 내뱉은 한숨이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