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아직도 남초 현상이 심한 산업을 꼽으라면 자동차 업계가 빠질 수 없다. 미국에서는 제너럴모터스(GM)의 차기 최고경영자(CEO)로 메리 바라 GM 수석부사장이 내정되면서 자동차 업계의 '여성 파워'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여성 임직원의 비중은 극히 낮다. 최근 수년간 여성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평가다.
우선 현대차그룹의 여성 임원은 현재 5명이다. 2010년 5명에 이어 2011년 6명, 2012년 7명까지 간신히 늘었지만 올해는 다시 5명으로 줄었다.
그나마 기아차의 첫 여성임원인 채양선(46) 마케팅사업부장(전무)과 현대차의 첫 여성 상무인 최명화(48) 마케팅전략실장만 '자동차인(人)'일 뿐 나머지 세 명의 여성 임원은 이노션·현대카드·현대엔지니어링 소속이다. 현대·기아차의 전체 임원 415명(9월 말 기준) 중 단 2명만이 여성인 셈이다.
또 2005년 2,230명(전체 임직원 5만4,440명 중 4.1%·국내 기준)이었던 현대차의 여성 임직원 수는 2012년 2,576명(4.3%)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현대차 관계자는 "자동차 업종의 특성상 여성 직원의 비중이 낮은 편이지만 최근 여성 신입사원이 크게 늘고 있다"며 "현재 양재동 사옥 인근에 어린이집을 짓는 중이고 대방동의 고객센터에 여성 휴게실, 수유실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여성 복지 혜택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쌍용자동차의 경우 여성 임원 수가 '0'이다.
다만 외국계 국산차 업체에서는 여성 임직원들을 좀 더 많이 만나볼 수 있다. 한국GM의 여성 임직원 수는 850여명으로 2002년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늘었다. 상무 이상 임원 164명 중 6명이 여성으로 비율로 따지면 현대차보다 훨씬 높다. 2008년 GM대우 시절 입사한 이경애(42) 전무는 2011년부터 한국GM의 마케팅담당 전무직을 맡아 '쉐보레'의 브랜드 마케팅을 이끌고 있다.
이 전무는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실과 한국 P&G 등을 거쳤다. 또 한국GM 홍보 부문의 황지나 전무는 HSBC·바이엘 등 외국계 기업에서 지난 25년간 홍보를 담당해온 전문가다. 특히 한국GM의 여성 사무직 직원 수는 823명으로 전체 사무직 4,993명 중 16.5%가 여성이어서 지난 2005년에는 한국GM 내부적으로 '여성 위원회'가 조직돼 여성 임직원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한국GM은 교보생명과 손잡고 국내 기업의 여성 임직원들을 초청해 매년 '여성 컨퍼런스'도 개최하고 있다. "전체 운전자의 약 40%가 여성인데다 남편이 자동차를 고를 때 아내의 의견도 반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동차 업계에서도 여성들의 의견이 중요하다"는 게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의 지론이다. 자동차 기획부터 개발, 마케팅까지 여성의 시각과 감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국산차 부문에서 여성 CEO가 탄생하려면 적어도 십 년은 걸릴 것으로 전망되지만 수입차 업계에는 브리타 제거(44) 메르세데스벤츠 대표가 있다. 그는 국내 자동차 업계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여성 CEO다. 취임 후 첫 3개월간 전국의 벤츠 전시장, 서비스센터, 딜러사를 둘러본 제거 대표는 여성 특유의 오픈마인드와 경청하는 자세,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그는 사장실에 늘 큼지막한 차트를 가져다 두고 '마인드맵' 방식으로 직원들과 회의를 한다. 빈 종이에 회의 참석자들의 아이디어를 하나하나씩 추가하는 식이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관계자는 "제거 대표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왜입니까(Why)?' '왜 안됩니까(Why not)?'"라며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곧바로 일을 추진하는 합리성과 괜한 선입견을 갖지 않는 개방성, 적극성을 두루 갖춘 리더"라고 표현했다.
이 밖에 폭스바겐코리아도 여성 인재의 힘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수입차 업체 중 하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 회사의 홍보와 마케팅의 총괄 책임자인 방실(40) 부장이다. 지난 2005년 폭스바겐코리아의 창립 멤버로 출발한 방 부장은 국내 해치백 시장 개척, 디젤 엔진에 대한 부정적 인식 개선 등에 관한 마케팅 기획을 지휘했다.
방 부장은 "자동차가 이동수단에 불과했던 과거에는 산업적인 측면이 강해 남성 위주의 문화가 정착될 수밖에 없었다"며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라이프 스타일'을 대변하는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최근에는 자동차 업계에도 감성적인 '소프트 터치'가 가능한 여성 파워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여성 인재 확보 방안에 대해 방 부장은 "'여성은 자동차를 모른다'는 업계의 고질적인 편견을 우선 극복해야 하고 여성들 역시 패션 아이템 다루듯 감성적인 부분에만 치중하기보다는 자동차 자체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선행돼야 업계에서 롱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