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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만에 가장 강력한 태풍이라는 '람마순'이 필리핀을 덮치기 하루 전인 지난 15일 필리핀 바탄주 리마이시. 대림산업이 프로젝트를 맡은 필리핀 최대 정유회사인 페트론사(社)의 바탄 리파이너리 RMP2 신축공사 현장이 이곳에 있다. 공장으로 향하는 바탄 지방도로에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헤치며 내달리는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공정률은 99.5%. 현장에서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핵심 시설인 100m 높이의 유동체촉매분리공정(FCC) 설비는 길었던 공사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듯 세찬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우뚝 서 있었다. 이 사업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내 업체로는 보기 드물게 대림산업이 프로젝트의 기본설계부터 담당했기 때문이다. 국내 건설사들이 시공능력은 우수하지만 기술력은 부족하다는 선입견을 대림산업이 깬 셈이다. 대림산업의 제안서를 본 발주처는 일본과 유럽 대형 건설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2억3,000만달러 규모의 공사를 대림산업에 안겼다. 유재호 대림산업 상무는 "유럽과 일본 업체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프로젝트였지만 기본설계와 시공을 한꺼번에 수행하면서 사업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고 이런 점이 대형 프로젝트 공사를 따내게 된 경쟁력이었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 국내 건설업계가 경쟁력 악화와 수익성 저하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물론 수주실적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올해 상반기에는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으며 중동·플랜트 중심의 지역·공종의 편향성도 상당 부분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업계가 느끼는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해외 건설 부문의 성장이 정체될 시기에 도달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성장은커녕 선진국 건설사의 단순 도급업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김민형 건설산업연구원 건설정책연구실장은 "지금도 양적으로는 국내 건설업계가 부족하지는 않고 이에 만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며 "하지만 국내 건설사들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이제는 경쟁력 강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건설업체는 지금 종합 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미국의 건설전문지 ENR가 지난해 선정한 해외 건설 부문 세계 7위의 건설업체인 프랑스의 '부이그'는 최근 캐나다 기술서비스 기업인 플랜그룹을 인수했다. 브이그는 빌딩 자동화 시스템,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 등에서 장점을 보이는 플랜그룹을 인수함으로써 캐나다에서 진행하는 민관협력사업(PPP)에 지금보다 더 높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건설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글로벌 건설시장은 파이낸싱과 설계·조달·시공·운영 등 건설의 각 분야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한데 묶어 단일 상품으로 판매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이른바 '건설 종합 서비스'다. 발주시장도 이런 추세에 맞춰 건설사들의 종합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민자발전(IPP)이나 PPP, 수익형 민자사업(BOT) 등 투자개발사업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 대형 건설사들은 건설시장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이다. 적극적인 인수합병(M&A)를 통해 능력 있는 자회사를 확보하고 고부가가치 기술과 전문화된 인력을 키워내면서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반면 국내 건설사들은 아직 이 같은 흐름에서 다소 뒤처져 있다. 지난해 국내 건설사가 투자개발사업 분야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삼성물산의 사우디아라비아 라빅2 민자발전 프로젝트와 SK건설의 라오스 세피안~세남노이 민자수력발전(IWPP) 프로젝트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반면 프랑스 최대 건설업체인 뱅시의 경우 지난해 민자사업 부문의 매출이 56억유로(7조7,000억원)에 달한다. 전년보다 3억유로 더 늘어난 것으로 해마다 민자사업 부문의 비중을 키우고 있다. 대형 건설업체의 한 관계자는 "국내 건설사들도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며 "하지만 인력과 자원·기술은 물론 정부 지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길은 정해져 있다…자본·사람·기술 키워야=변화하는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과 기술력 확보가 관건이라는 지적이다. 고급 인력과 기술력은 건설사의 수주경쟁력과 직결된다. 미국 '핸퍼드 지하수 처리시설 프로젝트'의 경우 발주처인 CH2M사가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미국 그린빌딩협회 국제친환경설계 인증(LEED)을 요구, 결국 미국 최초의 LEED 골드 인증을 보유하고 140여건의 관련 건축 실적이 있는 스웨덴의 '스칸스카'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시공권을 확보한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엔지니어링 업체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건설업체들의 사업 외형은 미국·유럽 업체보다 작지 않지만 기술 수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기본설계는 대부분 외국 기업들의 몫이며 국내 건설사들은 이런 부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국내 건설업계에 의미 있는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삼성물산이 최근 수주한 인도 뭄바이의 다이섹 복합문화시설 프로젝트의 경우 삼성이 발주처에 사업기획과 설계검토, 기술 타당성 분석, 공기 산정, 예산 산출 등의 '프리콘(Pre-Con)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의계약 형식으로 따낸 사례다. 발주처가 삼성물산의 건축 기술력을 인정한 것이다. SK건설은 미국 레이크찰스 LNG 프로젝트에 FEED(기본 디자인 설계)와 관련된 기술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GS건설은 베네수엘라의 엘팔리토 정유소 확장 프로젝트에서 프로젝트매니지먼트(PM) 업무를 맡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특히 개별 건설업체의 노력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인력과 기술 수준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중장기적인 해외 건설 발전 로드맵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 실장은 "인력과 기술력 등 소프트파워 육성에 관한 지원은 지금도 있다"며 "하지만 결과는 미흡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만큼 전반적인 시스템을 점검해 개선 방향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