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룡(수원)과 이고리 아킨페예프(CSKA모스크바). 이름값만 놓고 보면 정성룡은 명함도 못 내민다. 아킨페예프는 지난 2003년부터 러시아리그에서 거의 매 시즌 방어율 0점대를 찍고 있다. 2012년에는 707분 연속 무실점으로 러시아 신기록을 작성했다.
전설의 골키퍼 레프 야신(러시아)의 후예로 불리는 그는 자국 리그가 좋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유럽 빅 클럽의 러브콜도 뿌리친 '의리파'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유럽 예선에서 10경기 5실점으로 철의 장막을 친 것도 최후방 아킨페예프의 눈부신 선방 덕이 컸다.
반면 정성룡은 월드컵 전 마지막 평가전인 가나와의 경기(0대4 패)에서 4골을 내줬다. 실점을 전부 골키퍼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비난여론이 거셌다.
여론에 대한 물음에 "인터넷보다 오로지 월드컵만 생각하고 있다. 가족과의 연락도 끊었다"며 이를 악물었던 정성룡이다.
18일(이하 한국시간) 브라질 쿠이아바 아레나 판타나우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7위 한국과 19위 러시아의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1차전. 생애 두번째 월드컵에 나선 '넘버 원 골키퍼' 정성룡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국은 선제골을 터뜨리고도 1대1로 비겨 알제리와의 2차전을 이겨야 하는 부담을 안았지만 정성룡이 가나전 후유증을 극복하고 선방 쇼를 펼치면서 16강 희망을 부풀렸다. 정성룡의 활약은 아킨페예프의 실수 탓에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아킨페예프는 0대0이던 후반 23분 정면으로 오는 이근호(상주 상무)의 중거리 슈팅을 놓친 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위력적이지 않은 슈팅이라고 판단한 탓인지 안전하게 쳐내지 않고 잡으려 하다 공이 미끄러져 골라인을 넘어가버렸다. 이후 6분 만에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제니트)에게 동점 골을 내준 장면은 정성룡이 첫 슈팅을 잘 막았지만 수비가 걷어낸다는 공이 케르자코프에게 연결되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벨기에(승점 3)에 이어 러시아와 H조 공동 2위(승점 1)가 된 홍명보호는 오는 23일 오전4시 포르투알레그리의 베이라히우주경기장에서 최하위 알제리(승점 0)와 2차전을 치른다.
◇가나전 대패, 독 아닌 약이었다=홍명보호 최후의 보루 정성룡이 든든히 골문을 지키자 대표팀 전체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가나전 대패의 충격은 시간이 갈수록 잊혔다. 정성룡은 전반 27분 날카로운 코너킥을 안전하게 쳐냈고 4분 뒤 강력한 프리킥도 막아냈다. 후반 20분에는 판단이 조금만 느렸어도 골로 연결될 뻔한 왼쪽 크로스를 몸을 날리는 펀칭으로 처리했다. 경기 뒤 정성룡은 "결과는 무승부였어도 (경기력은) 괜찮았다. 알제리가 생각보다 강하지만 우리가 잡을 수 있다"고 한 뒤 중요한 말을 했다. "감독님과 선수단이 한 팀으로 움직였습니다."
가나전에서 보인 답답한 경기력에 어쩌면 러시아전도 대패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았지만 홍명보호에 가나전은 결과적으로 독이 아닌 약임이 증명됐다. 벼랑에 선 선수들은 공이 없을 때도 한발 더 뛰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이는 FIFA 공식 기록으로도 확인됐다. 공 점유율 52%로 러시아를 근소하게 앞섰고 패스 성공률도 77%로 2%포인트 높았다. 골문으로 향하는 유효슈팅이 6개로 러시아보다 4개 적었지만 결국 득점은 같았다. 중원의 한국영(가시와 레이솔)이 11.356㎞를 뛰어 가장 많은 활동량을 보였고 섀도 스트라이커로 나온 주장 구자철(마인츠)도 11.338㎞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최근 부진을 만회했다.
◇박지성 연호한 브라질 팬들=앞서 열린 브라질-멕시코전을 TV로 본 뒤 경기장을 찾은 브라질 팬들은 이날 박지성의 이름을 외치며 응원해 눈길을 끌었다. 박지성은 2011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고 최근 현역에서 완전 은퇴했다.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는 팬들은 후반 39분부터 갑자기 박지성을 부르기 시작했다. 박지성의 등번호인 7번을 달고 용모도 닮은 김보경(카디프)이 손흥민(레버쿠젠) 대신 투입됐기 때문으로 보였다. 한국 축구의 현재를 말할 때 박지성의 이름이 더는 나오지 않게 화끈한 경기를 펼치는 것도 대표팀의 과제인 셈이다. 해외 팬들은 한국 축구 하면 여전히 박지성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날 러시아전도 최소한의 목표로 삼았던 승점 1은 따냈지만 팬들을 만족시킬 수준은 아니었다. 체력 저하로 후반 11분 만에 이근호와 교체돼 나간 원톱 박주영(아스널) 활용법을 놓고도 홍명보 감독은 깊은 고민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슈팅 0개에 그친 박주영에 대해 홍 감독은 "전방에서 수비적인 역할을 잘해줬다"고 평가했다.
◇이근호 '월드컵 울분골'=후반 11분 교체투입돼 오른발 중거리 슛으로 선제골을 작렬한 '병장' 이근호에게 브라질 월드컵은 간절한 꿈의 무대였다. 지난 2005년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뒤 주전경쟁에 밀려 2007년 대구로 트레이드된 이근호는 대구에서 첫 시즌 10골을 넣으며 그해 6월29일 이라크와의 평가전에서 A대표팀에 데뷔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 맹활약하며 허정무호의 황태자로까지 떠올랐지만 본선 직전 유럽 진출 실패로 난조를 겪었고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지난해 8월 홍명보호에 승선한 그는 4년을 기다린 월드컵 무대 첫 경기에서 울분의 골을 터뜨리며 남은 경기에서 주요 공격 옵션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