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가 죽었다고 모두들 울상이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건전소비는 좋은 것이다」고 외칠 정도다.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소비는 악덕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방송과 신문 등 언론은 한 쪽에서는 건전소비를 외치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과소비를 타도하자는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과소비든, 건전소비든, 소비는 소비다. 각 개인이 느끼는 효용가치가 다르듯 소비도 일률적으로무엇이 건전소비고, 무엇이 과소비라고 정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과소비라고 비난받는 사람입장에서는 그것이 결코 과소비가 될 수 없다. 그는 그만큼 많은 돈을 지불할 가치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서민들이 고소득자를 과소비자라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만한 능력이 있고, 그 물건을 삼으로써 그만한 값어치를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이중적 잣대와 사고방식이 우리의 소비생활에서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직후 외제차에 기름을 넣어주지 않은 사례는 우리 국민들의 단선적인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그 주유원이 주유를 거부한 기름은 바로 수입한 외제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사고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대기업 임원으로 대표적인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李모씨(45·서울 대치동). 李씨는 「캘러웨이」골프 세트를 장만하려 했으나 결국 골프채만 만지작거리다 구입을 다음 기회로 미뤘다.
李씨는 『현재 사용하는 골프클럽이 너무 오래된 것이라 그동안 미뤄왔던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나왔으나 「지금이 어느 땐데 골프를 하느냐, 그것도 국산도 아닌 외제를 들고 과소비를 부추기느냐」는 오해가 싫어 물건을 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례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다. 돈이 있고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마저 제품구매를 꺼리는 풍토가 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한탕주의에 성공한 졸부들의 그릇된 소비행태는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모든 고가(高價)제품 소비를 「잘못됐다」고 몰아부치는 것은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데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자칫하다간 「성장의 불씨」마저 꺼트릴 우려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은행은 얼마전 『소득감소분보다 소비를 더 큰 폭으로 줄이는 초절약적 소비행태가 경기하강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턱대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과소비를 질시하는 풍토가 우리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이 잘못된 사회풍토를 해소하고 꺼져가는 성장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앞장서 경기부양 의지를 밝히고 소비위축을 풀어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양대 경영학과 장순영(張舜榮) 교수는 『가계소득 감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현재의 소비위축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며 『소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경기부양을 위한 거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무엇보다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민중기(閔仲基) 이사도 『부유층들이 고급음식점이나 옷가게 등을 드나드는 것을 색안경 끼고 보는 것이 이들의 소비를 막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최근의 상황이라면 특별소비세를 과감히 인하해서라도 고소득층들이 장롱속에 숨겨놓은 돈을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기만 하다. 대통령까지 나서 『소비가 애국하는 길』이라며 건전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대책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부 부유층들이 과소비를 조장하고 있다며 무분별한 사정(司正)과 세무조사를 남발, 소비심리 조장을 방해하는 요인만 양산하고 있다.
정부의 경기부양대책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경제의 앞날에 대한 소비자들의 걱정이 너무 커져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있는 마당에 통화공급 확대와 수요자 금융활성화를 통해 내수진작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의지만 밝히고 있을 뿐 미래에 대한 기대심리를 북돋아주는 대책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소 이종원(李宗源) 연구위원은 『경기부양에 대한 기대심리가 살아지지 않는 한, 돈을 아무리 많이 풀어도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면서 『한시적인 감세(減稅)정책이나 부동산경기 활성화 대책등을 조속히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건전소비를 위한 소비자 운동을 활성화하는 것도 소비를 늘리는 지름길로 꼽고 있다. 한국소비자연맹 여운연(呂運延) 사무총장은 『정부나 사회단체가 IMF이후 과소비 추방에 초점을 맞춘 소비자운동을 이제는 국가경제와 개인에게 이로운 소비쪽으로 유도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비위축이 샐러리맨들의 고용불안에서 비롯되고 있는 만큼, 구조조정을 하루 속히 마무리지어야만 내수진작을 기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LG경제연구소의 강태욱(姜泰旭) 선임원구원은 『언제 명예퇴직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퇴직이후 생존을 위한 샐러리맨들의 저축욕구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며 『정책당국은 구조조정의 선을 명확하게 긋고 마무리작업에 나서면서 경기부양을 시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반 김희중 차장(팀장), 채수종·이용택·고진갑·
권구찬·한상복·정승량·김기성·박형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