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상 배임에 따른 유죄인가, 아니면 정상적인 경영판단인가’
검찰이 기업의 회사채 저가발행 등 유사한 배임사건에 대해 엇갈린 판단을 내리고 시민단체가 최근 검찰의 잇따른 대그룹 오너ㆍ임원의 배임 무혐의 처리에 반발하면서 배임죄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특히 검찰이 연내에 삼성생명ㆍSKㆍ두산중공업 등 대그룹 부당내부거래 배임건에 대해 매듭을 지을 방침이어서 연말이 다가올수록 해당기업과 법조계는 물론 세간의 관심이 검찰의 배임죄 판단에 집중되고 있다.
형법 제 355조 및 356조의 배임죄는 ‘업무상 임무에 위배해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제 3자로 하여금 이득을 취득케 해 회사에 손해를 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조계는 일단 ‘임무 위배’라는 애매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배임죄의 속성상 회사의 객관적 손해 여부는 차치하고 손실평가조차 힘든 경우가 많은데다 피의자가 범의(犯意)를 부인하는 경우가 많아 배임죄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배임죄 성립하려면 손해 입증해야=지난 9월말 검찰은 98년 참여연대가 배임죄로 고발한 5대 그룹 부당내부거래 사건과 관련, 5대그룹 총수를 포함한 81명에 대해 무혐의결정을 내렸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배임죄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전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의 무혐의 결정 근거는 이들의 행위가 공정거래법에 위배될 수는 있어도 회사에 명백한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
배임죄의 객관적 성립요건인 회사손해가 입증되지 않는다면 아예 배임죄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법원 역시 입장이 명확하다. 최근 검찰은 건설사인 신한을 무자본 인수합병(M&A)하는 과정에서 신한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차입했다며 신한 대표 김모씨를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회사 정상화를 위한 경영 판단이었다며 무죄 판결했다. 법원은 객관적 회사손실이 없다면 ‘고의’를 입증할 수 있는 간접 사실이 필요한데 신한은 자금차입으로 오히려 회사 사정이 좋아졌다며 이같이 판시했다.
다만 판례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실은 끼치지 않았더라도 고의를 갖고 손해를 입힐 수 있는 상태를 만들었다면 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다.
◇고의 없다면 배임죄 안돼=배임죄는 자신이나 제3자가 이익을 볼 의도인 고의 즉, ‘사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립여부가 갈린다. 객관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 해도 의도가 선의인 경영상 판단이었다면 배임죄가 될 수 없다는 것.
만약 경영실패를 모두 처벌한다면 배임죄의 칼날을 피할 기업인이 거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법원은 지난 8월 부도난 한보ㆍ삼미 등 부실기업에 거액의 지급보증을 해줘 회사에 손실을 끼친 혐의(특경가법상 배임등)로 기소됐다 유죄가 인정된 전 대한보증보험 사장 2명에 대해 “손해가 발생했다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판단 경위 등 제반사항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검찰 재량권 남용 소지 적지않아=이같은 사법당국의 엄격한 적용과는 별도로 배임죄에 대해 검찰이 기소단계에서 재량권을 남용해 배임죄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배임죄는 회사손실이 명확치 않을 경우 피의자의 범의, 간접정황 해석 등 사법당국의 주관적 판단이 유무죄의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다. 배임죄에 관한 한 검찰이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세간의 비아냥이 나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조계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로 벤처기업 맥소프트뱅크와 삼성SDS의 비슷한 기업 사채 저가발행에 대해서 엇갈린 판단을 내린 것을 들고 있다.
검찰은 맥소프트뱅크 대표이사가 CB(전환사채) 저가발행으로 부당이득을 취했다며 기소해 유죄판결을 얻어냈지만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의혹을 샀던 삼성SDS는 무혐의 처리했다.
아울러 대기업 부당내부거래를 엄밀한 검토없이 배임죄로 고발하는 시민단체의 행태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참여연대는 경미한 대기업 부당내부거래를 무조건 배임으로 몰고 가고 있다”며 “공정거래법으로 처리할 사안을 엄격한 요건을 필요로 하는 형사상 배임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활동을 했던 한 변호사도 “참여연대가 대기업 부당거래를 배임으로 고발하는 것은 법리상 문제가 있다”며 “배임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