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앙은행이 채권자들의 상환 요구를 피하기 위해 수백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해외에 숨겨왔던 것으로 밝혀졌다.이에따라 외국 채권기관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외채협상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우려된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11일 세르게이 두비닌 전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의 말을 인용, 러시아가 지난 93~97년 사이에 영국해협의 저지섬에 있는 금융관리회사 「피마코(FIMACO)」를 통해 외환보유고의 상당 부분을 빼돌렸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구 소련 붕괴 이후 외화를 해외로 빼돌리고 있다는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돼 왔으나 이같은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의 외화보유고 해외 은닉이 비록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1,500억달러에 달하는 외국 채권기관들과의 만기 재협상이나 IMF와의 외채 추가협상을 더욱 어렵게 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화 은닉을 조사하고 있는 러시아 감찰부의 유리 스쿠라토프씨는 러시아가 지난 5년 동안 저지섬으로 빼돌린 외화자금이 500억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또 세르게이 스테파신 내무장관은 이날 정부회의에서 지난 92~93년 수출총액의 40%인 350억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갔고 94~98년에도 400억달러가 불법 반출된 것으로 추정, 지난 7년간 총 760억달러가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94~98년 사이에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두비닌은 지난 94년 14억달러가 반출된 것이 최대 규모라며 총 유출 규모가 수십억달러에 불과하다고 말해 감찰부의 이같은 주장을 반박했다.
문제의 피마코는 러시아 중앙은행이 78%의 지분을 갖고 있는 프랑스 소재 유로뱅크에 의해 지난 90년 설립됐으며 지난 93년 러시아 중앙은행이 외화보유고의 일부를 피마코를 통해 운용했으나 지난 97년 모든 자금을 회수했다고 두비닌은 덧붙였다.
그는 90년초 구 소련 붕괴후 스위스와 룩셈부르그의 일부 채권자들이 구 소련의 국가채무 회수를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함에 따라 중앙은행 외화보유고를 보호하기 위해 이같이 외화를 해외에 숨겨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마코는 러시아경제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수단이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이같은 관행이 없어졌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이번 외화은닉 폭로 사건은 러시아 내부의 권력투쟁 가운데 불거진 것으로 지난해 8월 모라트리움(대외채무 상환유예) 선언으로 대외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 러시아 정부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이형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