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도자가 다른 나라의 통화정책을 언급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사안을 전담하는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회담이 비교적 자주 열려 국가원수까지 나설 필요성이 작은 편이다. 다른 나라의 통화정책 비판이 주로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높아진 박 대통령의 발언 수위=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 통화정책 발언은 이례적이다. 박 대통령은 "자국만 고려한 선진국의 통화정책은 신흥국에 부정적 파급효과(spillover)를 미치고 다시 선진국에 악영향을 주는 역파급효과(spillback)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의 통화정책으로 신흥국이 타격을 입으면 이는 다시 선진국 시장의 불안 요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실제로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아시아 주식시장이 패닉에 빠지자 지구 반대편의 미국과 유럽 주식시장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붕괴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선진국이 통화정책을 펼 때 이웃 나라의 사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일본의 추가 양적완화,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 등 주요국의 통화정책 변화가 우리나라에 주는 악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 자국 화폐가치 절하로 주변국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명 '이웃 나라 거지 만들기' 정책을 가속화하는 일본의 아베노믹스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러시아 G20 정상회의에서 "선진국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국제금융시장·신흥국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까지 감안해 신중하게 통화정책 기조를 조정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위가 높아졌다. 박 대통령은 "최근 선진국들이 서로 다른 방향의 통화정책을 펴면서 국제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며 "선진국의 통화가치 쏠림 현상은 일부 신흥국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치이고, 일본에 치받히고…원화 변동성 아시아 최고=그만큼 미국·일본·유럽·중국 등 세계 거대 경제권의 통화정책 변화로 우리 경제를 둘러싼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려는 환율·주가 등 금융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양적완화를 종료한 지난달 29일부터 14일까지 달러 대비 원화 가치의 일평균 변동률은 0.55%로 주요 아시아 신흥국 중 가장 높았다.
최근 당선된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인도네시아(0.24%)에 2배에 달한다. 인도는 0.13%에 그쳤으며 태국 0.18%, 베트남 0.05% 등이었다. 특히 원·엔 환율이 다시 하락해 수출에도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14일 오후3시 현재 원·엔 환율은 100엔당 946원50전(외환은행 고시 기준)으로 2008년 8월12일(938원98전) 이후 6년 3개월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주가도 추풍낙엽이다. 14일 코스피지수는 월초 대비 0.98% 하락해 아시아 신흥국 중 말레이시아(-2.23%) 다음으로 큰 하락폭을 보였다. 인도 증시는 0.65% 올랐으며 인도네시아도 0.79% 하락하는 데 그쳤다. 이에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13일 "엔화 약세에 대한 우려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언급하는 등 한은과 정부는 힘겨운 방어전을 계속하고 있다.
◇'윤전기 아베' 간접 비판=또 박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추가 양적완화를 단행한 일본을 간접적으로 겨냥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상 자국 환 가치를 하락시켜 수출을 떠받치려는 정책이지만 미국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를 지지하자 견제에 나선 셈이다.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7일(현지시간) 프랑스중앙은행에서 열린 회의에서 "경기회복이 느리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채권 매입 등 비전통적 수단을 포함해 모든 활용수단을 동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도 "일본은행과 유럽중앙은행(ECB)이 비전통적 수단을 취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고 적절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