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은행(IB)으로서 세계적인 IB 강자들과 경쟁하려면 지피지기해야 합니다." 지난 2008년 산업은행 수장에 오른 민유성 행장이 취임 전 자신을 반대했던 노조에 했던 말이다. 금융권에서는 유독 해외파들이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글로벌 금융환경이 급변하고 대내적으로는 고부가가치 산업인 금융산업의 세계화가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해외시장에 대한 이해와 선진금융 기법을 익힌 해외파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해외파의 국내 유입은 1997년 외환위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관치와 인맥에 연연하는 낡은 시스템, 낙오자 없이 끌고 가는 호송선단식 구조를 갖고 있던 시중은행들이 외환위기로 휘청거리자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것이 시급했다. 경험도 노하우도 없던 당시 해외에서 선진금융 노하우를 몸에 익힌 리더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파의 주류 '씨티 출신'=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외국계 은행 중 국내에 가장 먼저 진출한 씨티와 뱅커스트러스트는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들어온 체이스맨해튼과 더불어 외국계 출신들의 주요 계보를 형성했다. 씨티 인맥의 대표는 장형덕 비씨카드 사장. 1976년 씨티에 입행한 장 사장은 '비씨카드 CEO는 정부 출신 인사가 맡는다'는 관행을 깨고 민간 출신으로 첫 비씨카드 사장에 올랐다. 하영구 현 씨티은행장,민유성 산업은행장 겸 산은금융지주 회장 등도 씨티맨으로 출발했다. 씨티가 첫 직장인 이들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씨티은행 출신 금융인 모임을 뜻하는 '씨금회'를 만들어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다. 민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외파 뱅커의 중심. 그는 뉴욕주립대에서 경영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씨티은행과 자딘플레밍증권ㆍ리먼브러더스ㆍ모건스탠리ㆍ살로먼스미스바니 등 외국계 금융회사를 두루 거쳤다. 하 행장은 씨티의 글로벌 체인을 돌며 금융 노하우를 체득한 인물. 입사 이후 줄곧 씨티그룹 내에서 한국과 아시아ㆍ라틴아메리카 지역 본부를 돌며 경력을 쌓았다. 최명희 외환은행 부행장은 여성의 일자리가 극히 제한됐던 1975년, 4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씨티은행에 입사해 서울영업점 총지배인 자리에 오른 경력이 있기도 하다. ◇보험ㆍ컨설팅 및 비금융 출신들의 도약=씨티 출신 외에도 외국계 투자회사나 컨설팅사ㆍ보험사 및 비금융사 출신들의 금융계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김한 전북은행장은 제너럴모터스(GM) 출신으로 이후 동부그룹 미국 현지법인에서 근무하는 등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김손영 녹십자생명 사장은 1970년 체이스맨해튼은행 부지점장을 시작으로 뱅커스트러스와 웰스파고은행, 푸르덴셜생명 부회장까지 지낸 국내 대표적 1세대 해외파 금융인이다. 원명수 메리츠화재 부회장은 미국 할리스빌보험그룹 부사장과 PCA생명 전무를 역임했다. 현대카드에서 전략기획을 맡고 있는 최진환 전무는 AT커니와 베인앤컴퍼니에서 각각 근무했다. 이정순 SC금융지주 부사장은 볼보건설기계코리아 부사장(CFO)을, 현재명 부사장도 미국 EDS 최고기술책임자를 지내는 등 비금융권 출신으로 금융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김진호 산은금융지주 전무는 럭키금성상사에서 국제금융부에서 근무한 후 UBS증권 서울지점에서 전무를 지냈다. 조기욱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에 있었다. ◇금융계 요직 해외파가 속속 장악=해외 대학에서 졸업하거나 석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면 금융회사 주요 요직에 오르지 못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미국 남가주대(USC) 경영학석사(MBA) 학위 소지자다. 윤용로 기업은행장도 미국 미네소타대 행정학석사를 취득한 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통화감독청에서 근무했다. 기획재정부 제1차관 출신인 김동수 수출입은행장은 미 하와이대 경제학박사 출신이고 기획재정부 제2 차관을 지낸 임영록 KB금융지주 사장 역시 미국 밴더빌트대 경제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윤만호 산은금융지주 부사장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국제전문가과정을 수료한 후 산업은행 싱가포르 현지법인 포트폴리오 매니저와 산업은행 뉴욕지점 부지점장을 지냈다. 김영기 산업은행 수석부행장은 미국 텍사스대에서 경영학석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산업은행 내 최고의 전략기획통으로 꼽힌다. 박동수 수출입은행 수석부행장은 미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 경영학석사 출신으로 수은 영국은행 부소장과 워싱턴 사무소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해외영업통이다. 우리은행에서는 김정한 부행장이 영국 에식스대 국제경제학석사 학위 소지자로 뉴욕지점장를 거쳤다. 이현주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은 미 미시간대 경영학석사 출신으로 하나은행 뉴욕지점장을 지냈다. 삼성생명에서는 곽상용 부사장을 비롯한 임원 9명이 해외 유학파다. 이 가운데 정봉은 상무는 영미 유학파가 아닌 일본 게이오대 보험학석사 출신으로 눈길을 끈다. 대한생명도 박석희 부사장을 비롯해 4명의 임원이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 이른바 '아이비리그' 출신들이다. 교보생명 역시 황용남 부회장을 비롯해 신용길 사장 등 7명의 임원이 미국 유학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