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사이드] 중고 아닌 중고 저렴한 가격으로 문화생활 누려

■ 헌책이 주목받는 까닭은

서울시 종로구 화동 정독도서관 서고 모습.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는 책들이 켜켜이 꽂혀있다. /박윤선기자

지난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알라딘 중고서점의 게시판이 이날 2,217권의 헌 책이 들어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수민기자

나는 3년 전 세상의 빛과 만났다. 내가 태어날 당시 내 안에는 370여장에 달하는 종이 위에 촘촘하게 새겨진 글과 세련되게 배치된 사진들이 담겨있었다. 사람들은 종이의 맨 위에 적힌 대로 나를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고 불렀다.

한 해 5만종 이상의 새 책들이 쏟아지는 서점 한 켠에서 우연히 만난 주인은 나를 아껴주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주인이 나를 꺼내 읽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하루하루 곰팡이들과 싸우며 빛을 보지 못하는 답답한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나를 꺼내 들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직장인 서모(33)씨는 지난 토요일 오후 인파로 붐비는 서울 강남역을 찾았다. 서씨의 가방에는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비롯해 그가 취미로 즐겼던 '스도쿠', 그리고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잡스'까지 총 3권이 담겨있었다. 모두 그가 한동안 즐겨 봤지만 최근에는 바쁜 일상으로 거의 들춰본 적이 없었다. 아쉽지만 오래된 책에게 새 주인을 찾아줘야 할 때라고 서씨는 생각했다.

헌 책이 주목 받고 있다. '중고'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 책들은 더 이상 이사를 가면서 내다 버려야 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은 내다팔고, 싼 값에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책을 사는 재활용 시스템이 서서히 구축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사회 트렌드를 주목한 업계에서는 온오프라인 매장을 구축해 헌 책을 거래할 수 있는 기업형 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개인의 손을 떠난 헌 책이 헌 책방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면 매해 엄청난 규모의 헌 책을 쏟아내는 도서관은 이 책들을 다 어떻게 처리할까. 도서관은 매해 새로운 책들을 사들여야 한다. 문제는 도서관의 공간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도서관은 공간 확보를 위해 매년 훼손된 책이나 오래된 책 또는 여러 권 여분이 있는 책들을 우선적으로 폐기한다. 이렇게 사라질 운명의 책 들을 구해내기 위해 각 도서관들은 학교ㆍ군부대ㆍ해외 곳곳으로 중고 도서를 보내주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헌 책방에서 해외까지 그야말로 헌 책이 책장을 벗어나 파란만장한 여행을 하고 있다.

사는이 파는이 급증… 대형서점도 진출

한 달 평균 10권 이상의 책을 구매하는 홍제훈(42)씨. 홍씨가 구매하는 책 중 3~4권은 헌 책이다. 홍씨는 "사이트에서 중고 책의 상태를 알려주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 수 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하다"며 "새 책과 함께 오전에 주문하면 저녁엔 받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배송도 빨라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경기불황 속에서 헌 책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성장하는 헌 책 수요를 잡기 위해 빠른 배송ㆍ품질 보장을 내건 대형서점들의 진출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사람들이 헌 책을 찾는 첫번째 이유는 저렴한 가격이다. 안철수의 생각 같은 신간도 새 책보다 5,000원 가량 저렴한 가격에 만나볼 수 있다. 2,000원에서 3,000원 하는 소설책도 많고 5권짜리 전집도 2만원 남짓이다.

절판된 책이나 희귀 도서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예스24는 "브랜드 출판사, 세트 도서, 특히 고가의 양장본도 인기가 높다"며 "이런 책들을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헌 책 시장에 부는 훈풍을 타고 가장 먼저 중고 서적 시장에 뛰어든 알라딘은 얼마 전 종로에 이어 강남에도 오프라인 매장을 냈다. 전년 대비 매출이 34% 오르면서 2008년 오픈 이후 연 평균 19%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뒤이어 2010년 중고 서적을 취급하기 시작한 교보나 예스24도 전년 대비 각각 53%, 70%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책을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파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송지형(39)씨는 지난 6월 서재에 쌓아만 두고 자주 읽지 않는 책 140권을 약 34만원에 팔았다. 송씨는 "중고서점 홈페이지에 책을 팔겠다고 신청하면 무료로 책을 수거해가고 2~3일이면 계좌로 돈이 입금 된다"며 "처음 팔아봤는데 번거롭게 책을 들고 가지 않아도 되고 용돈도 생긴 것 같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알라딘은 "처음 중고 사업을 시작하던 때만 해도 읽던 책을 판다는 것이 생소했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중고 판매까지 염두에 두고 책을 깨끗하게 보는 경우도 많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우리보다 헌 책 매매가 활발한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중고 서적이나 음반을 판매하는 북오프는 일본 내 매장 1,000 곳이 넘는 대표적인 헌책방 체인점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과 프랑스에도 진출해 10개가 넘는 해외 매장이 있다. 북오프가 이처럼 빠르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헌 책을 마치 '새 책을 사는 기분'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조명이나 매장 인테리어를 새 책을 파는 곳처럼 깔끔하고 밝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입수한 헌 책을 자체 제작한 연마기를 통해 깨끗하게 다듬고 헌 책 특유의 냄새까지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 내놓는다. 헌 책방이 많은 만큼 일본인들의 삶에서 헌 책을 사고 파는 행동은 매우 일상적이다.

최수진(28)씨는 일본 유학 시절 학교와 집 주변에 있던 북오프에서 수업 교재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사기 위해 종종 들르곤 했다. 최씨는 "책을 꼭 사지 않더라도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책을 둘러보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며 "헌 책을 버리는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헌책방에 내놓고 또 헌 책을 사가는 것이 일본인들의 일상"이라고 전했다.

도서관서 밀려난 책 학교로 군부대로

도서관에서도 헌 책이 생겨난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타는 탓에 파손되고 오손된 도서들도 있지만 자리가 없어서 밀려나는 책들도 있다. 매해 새로운 책들을 들여와야 하는 도서관으로서는 숙명적인 공간 부족 문제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서울시교육청 산하 22개 도서관에서 제적된 도서들만해도 2008년 22만2,910권, 2009년 25만5,902권 2010년 21만7,371권에 달한다. 이 중 더러워지거나 훼손 돼 정말 읽기 힘들어 버려지는 책들은 그리 많지 않다. 새로 들어오는 책들을 위해 대출 빈도가 떨어지는 오래된 책이나 복본이 있는 책들이 '제적리스트'의 주요 대상이다.

한 도서관 관계자는 "매해 새로운 책들은 들어오는데 나가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서고 공간이 언제나 부족하다"며 "매해 늘어나는 책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물론 공간이 없다고 책을 마구잡이로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도서관이 헌 책을 내 보내는 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도서관에게 책이란 일종의 공공재산이기 때문이다. 이용가치가 상실되거나 훼손 또는 파ㆍ오손 된 책, 기타 도서관장이 필요하다고 정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자료 폐기는 도서관별 자료선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폐기할 수 있는 양도 도서관 전체 장서의 7%를 넘을 수 없다. 도서관 도장이 찍혀있는 책 들은 절대 헌 책 시장에 유통시킬 수 없고 폐기가 원칙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고 해도 읽을 수 있는 멀쩡한 상태의 책들이 도서관을 떠나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버려질 운명의 헌 책들을 구명하기 위해 도서관들은 기증이나 동네 문고 개설 등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강남도서관은 지난해 사립작은도서관협회에 500권의 책을 기증했고 서울어린이도서관은 중국연길시소년아동도서관과 교류협정을 맺고 자료를 기증하고 있다. 정독도서관은 해외한인거주마을에사랑도서보내기운동본부와 월드문화나눔운동본부 등 단체에 제적도서를 주고 있다. 남산도서관도 '다람쥐 문고'라는 이름으로 상설 문고를 만들어 남산을 찾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렇게 기증 되는 도서는 2008년 전년대비 36.9%에서 2010년 512%까지 늘어났다. 주요 기증처도 공부방, 군부대, 학교, 해외, 마을 문고나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등 다양해지는 추세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지역별로 보존도서관을 만들어 도서관의 고질적인 공간 부족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보존도서관이란 대출을 목적으로 하는 도서관이 아닌, 이름 그대로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도서관이다.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국내의 모든 간행물을 받아 수집하고 보관하는 기능을 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면적 1만㎡ 지상 2층, 지하 4층 규모의 자료 보존관을 별도로 운영하는 이유다.

한 도서관 관계자는 "도서관에서 제적 대상이 되는 오래된 책들은 가치 있는 초판본일 수도 있고 절판돼 이제 몇 권 남지 않은 책일 수도 있다"면서 지역별로 보존 도서관을 세우면 도서관들이 자료를 이관할 수 있는 장소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 공간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소 될 것이고, 희귀한 자료 보존과 그 자료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해 줄 수 있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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