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자상] 金鍾珉 삼성종합기술원 박사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김종민 박사의 연구 세계
지난 96년 11월 3일. 삼성종합기술원엔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하하!" 웃음소리가 사무실이 떠나갈 듯 했다. "노총각 드디어 장가가네!"라는 말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삼성종합기술원 전직원은 사내방송을 통해 20분 동안 진행된 김 박사의 결혼식에 애정의 박수를 보냈다.
불혹(不惑)을 훌쩍 넘긴 41살. 김종민 박사는 실험실에 바친 청춘을 만회하기라도 한 듯 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총각생활을 청산했다.
삼성종합기술원의 디스플레이 랩(Lab)장으로 IBM이 출자해 세운 FED사의 선임연구원으로 또 그 이전에는 미 육군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꿈의 디스플레이' 연구에만 매달려 십 여년을 달려온 그였다.
김 박사는 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지독하게 가난했어요. 찢어진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때문에 그는 혼자 힘으로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김 박사는 철도고등학교를 나와 모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욕심은 어쩔 수 없었다. 대학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철도에서 막노동으로 다섯 달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 집에는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박사는 당시 3개월 재수 끝에 홍익대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김 박사가 디스플레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뉴저지 주립공대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이곳에서 석ㆍ박사를 받고 미육군 연구소서 FED개발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또 IBM이 투자해 설립한 FED사에서도 똑 같은 일을 했다. 94년 한국에 돌아온 것은 삼성측의 요청에 의해서다.
김 박사가 총괄하는 디스플레이랩엔 모두 55명의 연구원이 근무한다. 그는 개발팀을 '대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이다. 개발팀 개개인과 흉금을 터놓고 지낸다.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그 중 하나. 그는 푸근하다. 개발팀원들이 김 박사와의 첫만남에서 김박사를 '큰 형님'처럼 느낀 것도 이 때문이다.
개발팀은 24시간 체제로 돌아가기 일쑤다. 중요 연구에 대한 성과를 얻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김 박사는 가장답게 연구원 한명 한명의 사생활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자율적인 분위기가 조성돼야 연구도 잘되는 법입니다. 집안처럼 편안한 연구실을 만들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박사는 요즘도 하루 14시간을 일한다. 많이 일하는 것은 그가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긴 버릇이다. 그래서인지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일이 좋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활발한 대외활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국제 디스플레이 제조 컨퍼런스 기술위원회와 국제 디스플레이 연구 컨퍼런스 기술위원회 위원이다. 또 국제학회에서 초청강연한 것도 많다. 특히 국제 디스플레이 워크숍, 정보디스플레이학회, 나노튜브 워크숍 정회원이다. 그가 발표한 국제논문만 130여편에 달한다.
또 연구 과정에서 얻은 성과 중 특허다 싶으면 결코 놓치지 않는다.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한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지금까지 받은 출원한 국제특허가 80여편에 이른다.
때문에 삼성종합기술원내에서 '특허왕'으로 통한다.
"이제 연구원 모두 디스플레이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가 됐습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한국은 세계 최강의 디스플레이 국가로 군림할 것입니다." 김 박사는 팀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병도기자 do@sed.co.kr
김종민박사가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수상을 기념,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해온 연구원들과 함께 기뻐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