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5월30일] 볼테르

‘런던 증권거래소는 법정보다 더 존경스럽다. 유대인과 이슬람교도ㆍ기독교인이 같은 신을 섬기는 것처럼 평화롭게 거래한다. 이교도란 신용불량자다.’ 조국 프랑스의 귀족사회와 종교적 억압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에 망명한 볼테르(Voltaire)가 막 피어나던 자본주의에 던진 찬사다. 볼테르는 루소ㆍ몽테스키외와 더불어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 1694년 평민으로 태어나 1778년 5월30일 사망하기까지 99권의 저술과 2만여통의 편지를 남겼다. 귀족의 부당한 권위와 권력에 저항하고 고문과 차별적 법체계를 타파하려고 애썼으며 인간의 진보를 확신한 철학자다. 그가 머문다는 이유만으로 인구가 10배나 불어난 마을도 있다. 저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한 ‘최초의 지식인’. 한 세기 후에 태어나 ‘레 미제라블’을 지은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고 극찬했다. 자본 축적에서도 남 달랐다. 책값이 없어 서점에서 박대까지 당했던 그는 돈벌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최초로 큰돈을 만진 것은 복권. 당첨 가능성을 치밀하게 계산, 한밑천 잡은 후 그토록 경멸했던 귀족과 공모해 돈 되는 공채를 싹쓸이한 적도 있다. 국제곡물시장 투기, 유명세를 이용한 군납 독점, 부동산 개발과 주식 투기 등 건드리지 않은 게 거의 없을 정도. 오랫동안 살을 맞댔던 정부에조차 편법 고리대를 받았다. 말년의 그는 거대한 성에서 시종 160명을 거느리며 유럽 20위권의 부호로 살았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임종 직전 귀국할 때는 수십만명의 파리 시민이 그를 반겼다. 돈과 명예를 함께 누린 비결은 억울하게 재판받는 보통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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