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池萬元)사회발전시스템 연구소장일본에는 반도체 제조업체가 14개나 된다. 도시바, 후지쓰, NEC, 미쓰비시, 마쓰시타, 오오키, 히타치, 케논, 닛폰, 코닥, 샤프, 산요, 소니, 스미토모 등이다. 반도체 기술은 제조공법 기술이다. 기술개발을 위한 중복투자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나섰다.
이들 14개업체들은 일본정부의 중재로 공동출자하여 새로운 제조공법을 공동개발해 분할생산해 오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정부는 NTT와 정부연구소에 특별 연구팀을 만들어 제조공법을 연구시키고 있다. 일본정부와 업체와의 시너지 효과에 의해 미국의 3대 D_RAM 메이커인 모토롤라, 인텔, 몰스텍은 1985년도에 생산라인을 모두 폐쇄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나는 일본 정부의 역할이 주는 교훈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력 잃은 미국 회사들이 즉시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이다.
정부가 반도체 합병을 강요하는 이유중 가장 큰 것은 매년 3,000억원 정도의 개발비가 중복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구개발비 중복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빅딜보다는 일본정부의 모범이 더 간단하고 유익하다.
업체의 통합보다 중복투자가 가장 큰 부분인 연구개발 기능부터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 제조기술은 같아도 공정의 과학화 수준은 기업마다 다르다. 85년이후 미국도 이러한 일본의 교훈을 따랐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이 해마다 빚을 증가시켜 왔다면 그건 정부의 금융감독 소홀 때문이다. 경쟁력에 밀린 미국 업체들은 여지 없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경쟁력 잃은 한국 업체들은 문을 닫지 않았는가? 빚을 얼마든지 갖다 쓸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지금도 부실기업에 돈을 대주고 있지 않은가. 한국기업들이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것은 바로 정부가 이렇게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왔기 때문이다.
반도체 빅딜을 놓고 정부와 LG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 싸움은 현정권과 국민경제 모두에 피해만 준다. 정부는 ADL사가 세계적인 회사라는 점을 내세우지만 이번만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계적인 회사라면 당사자가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보고서를 내놔야 한다. 또한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투명한 논리를 가지고 당사자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당사자인 LG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결론에 대해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갖는다. 이 당연한 권리에 대해 정부가 LG만을 몰아붙이는 건 이치에 안 맞는다. 반도체에 관한한 현대는 LG보다 후발업체이다. 재무구조도 LG가 다소 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복투자의 책임이라면 현대쪽에 더 물어야 한다.
반도체 시장은 국제시장이다. 적은 물량을 놓고 중복투자와 과당경쟁을 일삼아 온 철도차량이나 항공 3사와는 다르다. 반도체가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것은 반도체 뿐만 아니다.
또 국제 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빅딜을 하라지만 빅딜을 한다고 경쟁력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경제를 살리는 첩경은 「게임 원칙」 즉 「보이지 않는 손」을 만드는 길이지 빅딜이 아니다.
항공 3사와 철도차량 3사에 대한 빅딜 차원의 강제통합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각 회사들은 납득할 수 없는 조치에 대해 제각기 똬리를 틀고 있고, 그 위에 임명된 사장은 별로 할 일이 없다. 빅딜로 인해 차량 단가도 내려가지 않고 재무구조도 향상되지 않았다. 빅딜로 무엇이 좋아진단 말인가?
전철용 객차는 대당 6억원씩에 납품되고 있다. 그러나 단가는 충분히 3억원으로 내려질 수 있다. 빅딜보다 더 좋은 대안을 생각해보자. 첫째, 대당 가격을 3억원 대로 내린다고 발표하자. 둘째, 향후 10년간 정부가 구입할 연간 물량을 발표하자. 셋째, 철도사업으로 인한 적자를 메우기 위해 요청되는 여신을 일체 중단한다고 발표하자. 이 세 가지가 발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철도차량 제조업체들은 스스로 알아서 진로를 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