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0월22일] 젠킨스의 귀 전쟁


1739년 10월23일, 영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언했다. 포고문을 읽었지만 월폴 수상은 정작 전쟁에 뜻이 없었다. ‘존경 받는 초대 수상’ 월폴은 왜 주저하며 전쟁에 나섰을까. 단초는 젠킨스의 잘려나간 귀. 영국의 밀무역선이 1731년 서인도제도에서 스페인의 검문을 받는 과정에서 젠킨스 선장의 한쪽 귀가 잘린 게 발단이다. 젠킨스는 바로 귀국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사소한 일’로 간주돼 호응을 얻지 못했다. 사건이 불거진 것은 7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1738년부터. 양당정치 정착 초기 휘그당의 질주에 제동을 걸려던 토리당이 정치쟁점으로 삼고 야당 계열 신문들이 ‘영국의 자존심’을 들먹이자 결국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은 곧 이어 터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일부로 파묻혀버렸다. 때문에 ‘잊혀진 전쟁’으로도 불리지만 젠킨스의 귀 전쟁은 역사에 적지않은 흔적을 남겼다. 번영하던 푸에르토 벨로스 일대는 영국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기 직전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영국 국가 ‘신이여, 국왕을 굽어 살피소서’가 처음으로 공식 연주된 것도 파나마 지역을 공격한 영국군의 런던 개선식 행사에서다. 영국의 조지 앤슨 제독은 중남미와 필리핀을 공격하는 와중에서 지구를 돌아 마젤란과 드레이크에 이어 세번째 세계일주 항해자라는 영예를 덤으로 얻었다. 힘이 빠진 스페인의 식민지에서는 독립의 기운이 솟아나 훗날 시몬 볼리바르의 중남미 독립혁명으로 이어졌다. 북미에서도 영국군 3만명을 돕기 위해 식민지 의용군 4,830여명이 조직됐으나 생환자는 600여명. 스페인의 보물을 빼앗겠다는 욕심에 자원했지만 황열병으로 죽어나간 아메리카 병사들은 꿈에서 깨어나 남의 전쟁에 희생됐다는 반영감정을 품었다. 미국 독립의 씨앗이 여기서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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