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동하는 원ㆍ달러 환율에 대한 처방으로 ‘원화의 국제화’가 해법이 될 수 있을까.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5일 인도 하이드라바드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원화의 국제화를 진진시키는 로드맵을 조만간 결정할 계획이라며, 그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가 튼튼해 우리나라 돈을 쓰려는 수요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수요가 적다고 해도 규제개혁을 통해 국제화 시기를 앞당길 필요가 있다”며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경제규모가 됐을 때 원화 국제화를 추진한다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부총리는 지난 해 6월초 과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원화의 국제화가 이뤄지더라도 수요가 있느냐를 고려해야 한다”며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외환규제를 풀어도 외국인들이 원화를 보유하지 않을 수 있다”고 국제화에 대한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었다. 경제부총리의 인식이 불과 1년도 안돼 바뀐 시기가 원ㆍ달러 환율 급락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이 우선 주목거리이다. ‘원화 국제화’를 환율 급변동에 대한 해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짐작이 가능하다. ◇원화의 국제화는 역대 정권의 단골 메뉴 = 사실 따지고 보면 ‘원화의 국제화’는 역대 정권에서 수시로 거론된 ‘단골메뉴’였다. 지난 88년 한국이 IMF 8조국(경상주지 적자를 이유로 무역을 제한할 수 없는 나라)으로 이행하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해 6공화국(노태우 정권) 이후인 문민정부와 국민정부, 참여정부 등이 국가적 정책 아젠다로 내걸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히 국제투기자금의 공격 가능성과 거시경제 운용상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렇다면 한 부총리는 역대 정권들과 달리 ‘원화의 국제화’를 앞당길 어떤 묘책을 갖고 있을까. 참여정부는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10년이상 금기시 됐던 외국인의 원화사용을 일부 허용했다. 지난 1월부터 허가사항으로 돼 있던 외국인의 원화차입을 부분적(10억원이하 한국은행 신고)으로 풀어준 데 이어 당초 2008년으로 돼 있는 이 한도도 앞당길 방침이다. 권태균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은 “원화의 국제화는 외국인들과 내국인의 국내외 원화사용을 늘려 외환시장의 폭과 깊이를 늘리자는 데 있다”고 근본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4월 해외에서의 원화환전 규제를 푼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외국 사람들이 원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줘야 원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나아가 국제화의 토대를 만들 수 있다(황건일 재경부 외환제도혁신팀장)는 의도다. 문제는 현 정부가 추진중인 환전이나 수출입 등 경상거래에서 원화 규제완화는 아주 초보적인 단계이고, ‘원화의 국제화는 이런 길을 걸여야 한다는 식’의 딱 떨어진 사례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제도 때문에 국제화가 안 되는 것은 사실 별로 없다”는 재경부 실무자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원화의 국제화’는 말 그대로 우리 경제의 실력을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내놓을 추가적인 원화 국제화 로드맵이 자칫 실체 없는 ‘립 서비스’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환율 급변동에 대한 해법이 될까= 전문가들은 원화의 국제화가 이뤄질 경우 외국인 등 비거주자들이 국내에서 원화를 자유롭게 사용할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자유롭게 자본거래를 허용하겠다는 것인데,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추진할 경우 가뜩이나 취약한 외환시장이 투기자금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내놓고 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국제화의 득실을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원화 국제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일본의 경우 대외적으로 통화국제화를 한 것이 아니라 경제발전에 발목을 잡지 않는 선에서 수동적으로 용인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80년대 중반 국제화를 본격 추진한 일본과 독일의 경우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무역비중은 각각 8.3%, 9.3%에 달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무역규모(2002년말기준)는 세계 교역량의 2.4%, 경제규모도 전세계 GDP에서 1.5%에 불과하다. 신 교수는 “한 통화가 국제화 되려면 통화에 대한 대외수요가 커지고 장기간 강세가 돼야 한다”며 “원화 국제화가 환율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제화의 결실로 환율이 안정될 것이라는 정부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불확실성에 휩싸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년이상 원화의 국제화를 검토해온 한국은행의 한 실무자는 “역대 정권에서 원화의 국제화를 수없이 검토했지만 항상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에서 그쳤다”며 “통화의 국제화라는 것이 금융시장의 완전개방을 의미하는데 과연 우리 현실에서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통화의 국제화가 이뤄질 경우 환율 변동성은 더욱 커져 관리 개념을 떠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외국인의 차입규제가 없는 호주 달러화의 경우 1년동안 40%가량이 위아래로 움직일 정도로 변동폭이 컸던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아시아 지역 내에서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1차적인 목표를 두고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병화 국제금융센터 소장은 “원화의 국제화를 무조건 추진하기 보다 우리에게 유리한 부분은 당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미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화 국제화라는 거대한 ‘아젠다’만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국제화 진전에 따른 환율변동성 확대 등 금융시장 안정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원화의 국제화가 장기적인 아젠다라 할지라도 우리 경제체질의 강화와 맞물리지 못할 경우 오히려 얼굴 없는 사냥꾼의 먹이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