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의지가 있으나 실력이 없었다. 미국은 그 반대. 실력을 갖췄지만 의지가 부족했다. 프랑스는 안정을 이룰 만한 힘은 없었던 대신 파괴할 만한 힘은 있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찰스 킨들버거가 진단한 전간기, 즉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경제 기상도다. 책임 지지 않으려는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세계대공황. 1929년 미국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한 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된 계기는 1931년 5월의 오스트리아 크레디트안슈탈트은행의 파산. 나라 전체 기업 대출의 70%를 차지하던 이 은행의 파산에 국제연맹 금융위원회가 1억오스트리아실링의 차관을 공동 조달하기로 합의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소규모 차관마저 지연돼 오스트리아의 자금이 고갈된 가운데 정치적 악재가 덮쳤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 관세동맹 파기를 요구하고 나선 것. 오스트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내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영국이 1931년 6월16일 단독으로 차관을 댔다. 규모 5,000만오스트리아실링(미화 700만달러)에 기한 일주일. 급전으로 위기는 넘어갔지만 문제는 후유증. 긴급 단독차관의 규모가 작고 기한도 초단기였다는 점은 세계금융시장의 최종 대부자로서 영국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프랑스는 영국의 비협조에 분개해 보유 파운드화를 내다 팔아 금을 사들였다. 영국은 결국 초단기 차관을 내준 지 100일 뒤에 금본위제도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무역정책도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바꿨다. 세계경제가 파국으로 내닫는 동안에도 자금 여력이 있는 유일한 국가였던 미국마저 자국 이익 챙기기에 골몰해 세계경제는 2차대전 발생 직전까지 대공황을 앓았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국제공조가 이뤄지고 있어 다행스럽다. 협력과 신뢰에 글로벌 경제위기를 벗어날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