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경제 아시아 그리고 한국

칼라일은 정치경제학을 왜 그렇게 우울한 학문으로 생각했을까.우선 토지와 천연자원의 희소성에만 사로잡혀 있던 그 시대의 인물, 로버트 맬더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책임이 크다. 가족계획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훨씬 이전이었던 만큼 맬더스주의자들은 섹스라는 인간의 내재적 욕구로 인해 인구가 토끼처럼 불어날 것으로 판단했다. 미래 사회에는 인간이 간신히 서 있을 만한 공간만 남게 되고 수확체감의 법칙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찰스 다윈은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으면서 적자생존의 원칙이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부인은 남편의 무신론이 현세와 내세의 삶을 불행에 빠지게 만들 것이라고 슬퍼했다. 그러나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다. 곧 21세기가 도래한다. 앞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출생률이 낮아져 전체 인구가 줄어들고 노령인구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이럴 경우 2050년엔 1인당 토지 면적이 오히려 지금보다 늘어나게 된다. 학자와 엔지니어들의 두뇌가 총집결된 사이언스(SCIENCE)는 대다수의 영역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결국 패배하고 말 것으로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식자(識者)들마저 경제학을 긍정적이고 유쾌한 것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항상 윤리문제로 고민하는 로마 교황청은 요즘 문명의 진행 방식에 절대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시장경쟁의 횡포에 대항하는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소리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대형 헤지 펀드의 투기행위를 아시안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돌리고 있다. 한국과 타이완, 싱가포르는 서구인들이 생각할 때 자신들이 과거 거쳐왔던 기적적인 경제발전 형태와 매우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90년대 들어 호황을 지속하고 있는 미국 경제는 많은 이들에겐 애증의 대상이다. 창조적 파괴란 현재의 무자비한 경제에 대한 경멸적인 슬로건에 불과하고 대다수 전통주의자들에겐 오직 고통스런 경제일 뿐이다. 기술적 변화와 소득감소 현상이 가속화할 경우 다원적 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들 역시 사회안정망의 혜택에서 벗어나게 된다. 민간부문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간의 불평등이 더욱 확대되는 반면 정부의 재분배 역할은 훨씬 줄어들 전망이다. 미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은 무거운 상속세를 없애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 중이다. 경제분야와 마찬가지로 정치부문에서도 추세는 한쪽 방향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복귀했다. 자유방임국가가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불가피한 미래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성행했던 사회민주주의와 비교해 보면 시장의 메카니즘에 좀더 비중있는 역할이 맡겨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감히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미래의 경제학 저술가들은 비인간적인 시장과 정부의 자유재량적 규제·감독 사이의 최적점이 될 수 있는 혼합경제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문제는 경제학자와 사상가들의 기본 특성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복잡한 이슈를 놓고 활발히 논쟁할 만한 가치는 있다. 한국의 경우 지금까지 재벌 개혁면에서 속도가 느리고 점진적인 편이다. 유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라면 이같은 지지부진함에 눈살을 찌푸릴 게 확실하다. 밀턴 프리드먼 교수 등 시카고학파의 자유시장주의자들도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특정 윤리나 인종적 이념에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 보다 실용적이고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 대법원은 인종 차별문제가 시간을 갖고 사려깊은 방식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인도네시아인이나 말레이시아인이 된다고 해서 한국과 타이가 성공적으로 취해 온 고통스런 적응과정을 피할 수는 없다. 또 비(非) 아시아계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된다고 해서 상승과 하락을 되풀이하는 금융시장의 불예측성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대 유럽의 크누트왕은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바닷물을 멈출 수는 없다고 천명했다. 나는 경제학이 상당한 균형감각을 요구하는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경제학 그 자체는 전적으로 우울한 것도, 전적으로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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