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3월10일] 헨리 손턴


케인스와 밀턴 프리드먼, 크누트 빅셀, 어빙 피셔. 경제학설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화폐론의 대가들이며 헨리 손턴(Henry Thornton)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손턴은 고전파 최고의 화폐이론가로 꼽히는 인물. ‘화폐이론사는 손턴의 통찰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긴 여정’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1760년 3월10일, 런던에서 태어난 손턴은 은행가 출신의 하원의원. 박애주의자이며 노예제도폐지론자로도 유명하다. 첫 직업은 회사원. 사촌의 회계사무소에서 18세부터 일을 배운 손턴은 2년 후 부친의 러시아무역회사로 옮겼다. 영국 최고 부자였던 부친 존 손턴과 공동 운영자라는 지위에 오른 손턴은 22세에 의회로 뛰어들었다. 깨끗한 선거운동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손턴은 1815년 사망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화폐전문가로 인정받은 계기는 1802년 펴낸 ‘지권신용론(紙券信用論)’. 정치인이자 22세부터 런던 최대의 은행을 운영한 은행가로서의 경험을 담아 금화와 종이돈 발행 규모, 인플레이션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책자다. 의회는 은행실무와 이론을 섭렵한 그를 파운드화 가치 안정을 위해 설치한 ‘지금위원회(地金委員會)’의 핵심 멤버로 앉혔다. ‘최초의 통화논쟁’이라는 지금위원회의 보고서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혜성같이 등장한 리카도에게 밀리고 한창 일할 무렵(55세) 사망해 학자로서는 크게 기억되지 않지만 손턴은 영국인의 행동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복음주의에 입각해 가진 자로서 의무(nobless oblige)를 강조한 클래펌파의 일원으로서 그가 주창한 솔선수범은 영국 상류층의 행동규범에 남아 있다. ‘전망 좋은 방’을 지은 소설가 포스터도 그의 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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