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히지 않은 恨' 첫 여성 총리
(서울=연합뉴스) 고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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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통치 막바지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밤새고문을 당했던 여성운동가가 27년만에 총리의 부인이 아닌 총리 자격으로 삼청동 총리공관에 입주하게 됐다.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됨으로써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가 된한명숙(韓明淑) 총리는 유신시절 민주화운동을 벌이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한 피해자다.
한 총리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것은 이화여대 재학시절 서울대와의 학생연합단체 `경제복지회' 에서 만난 남편 박성준(朴聖焌) 성공회대 교수의 영향이 크다. 4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 박 교수가 결혼 6개월여만인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자 한 총리의 인생도 변했다는 설명이다.
한 총리는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이 출감할 때까지 13년간 일주일에 한번씩교환한 편지를 통해 남편과 닮아가게 됐다.
한 총리는 "우린 편지만으로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철학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며 "나는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이었고, 점점 더 강하고 맹렬한 투사가 돼 갔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화여대 사감이었던 한 총리는 1970년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70년대 초반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양극화'로 진단한강원용 목사가 주도한 단체였다.
한 총리는 소외여성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는 여성사회간사로 활동했지만, 1979년 다른 간사들과 함께 체제 비판적인 각종 이념서적을 학습하고 반포한 혐의로 구속됐다.
한 총리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글에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 몸이 묶인 채 밤새도록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소개한 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며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한 총리는 지난 17일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의 투옥 경험과 관련, "한이맺히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굴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 속에서 저뿐 아니라많은 사람들이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며 "저는 한이 맺히지 않았다"고 말해 눈길을끌기도 했다.
2년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한 총리는 진보적 여성운동의 조직화를 목표로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1987년에는 전국 20여개 여성단체를 한데 묶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1993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선출되면서 여성운동의 대모자리를 굳힌한 총리는 지난 1999년 김대중(金大中) 당시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당 비례대표로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2001년에는 여성부 초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한 총리는 여성근로자의 출산휴가 기간을 30일 연장하고, 출산휴가 급여를 신설하는 내용의 모성보호법 개정의 산파역을 맡아 여성권익 신장을 위한 법적.제도적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된 한 총리는 17대 총선 직전 장관 직을 사퇴한 뒤 우리당에 입당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지역구(고양 일산갑)에서한나라당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홍사덕(洪思德) 전 의원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한 총리는 17대 국회에 등원한 직후 총리후보로 유력하게 부상하기도 했지만,당시에는 참여정부 국정 2기를 이끌고 나갈 `돌파력'이 새로운 총리 기준으로 제시되면서 이해찬(李海瓚) 전 총리에게 막판 `역전'을 허용한 바 있다.
입력시간 : 2006/04/19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