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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배기 아들이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연필도 어렵게 쥔 아이에게는 공책의 네모 칸에 맞춰 글자를 써넣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아이는 이내 글씨 쓴 자리를 시커멓게 뭉개버렸다. 그 순간 화가인 아버지는 목적지향과 체념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고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1967년의 어느 날이었다.
주인공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이자 최근 재조명받고 있는 단색화의 '원조' 출발점인 박서보(84·사진) 화백이다.
"화면을 비워내야 한다, 그리고자 하는 욕망을 체념해야 한다는 것은 깨우치고 있었지만 이를 어떻게 화폭으로 옮겨낼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행동에서 해법을 발견한 것이죠. 이후 3~4년간 연필 작업을 계속하면서 '묘법(描法)' 등 나만의 방법론을 다듬어 작품세계를 구축하게 됐습니다."
거장의 예술세계를 뜻밖에 간단한 일화에서 끄집어낸 작가가 그의 속살을 보여주는 '박서보의 묘법:에스키스-드로잉'전을 3월 11~31일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연다. '에스키스'(esquisse)란 작품구상을 정리하는 설계도 격이며 '드로잉'(drawing) 역시 작가의 생각을 처음 종이에 옮기는 초벌그림을 뜻하는 것이라, 이번 전시는 작가의 민낯과 마주한다는 의미가 있다.
박서보의 '묘법'은 연필로 비슷한 선을 무한히 긋는 작업으로, 이후에는 캔버스를 물감으로 덮은 뒤 연필로 선을 긋고 다시 물감으로 지우고 선을 긋는 행위의 반복으로 이어졌다. 지우는 행위의 반복과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됐다. 그 결과물로써 그림 위에는 부조 같은 질감이 남았는데, 1996년 이후에는 평면 위의 도드라짐이 체계를 갖춰 자로 잰 듯 반듯한 후기 묘법 시리즈까지 낳았다.
작가는 "작업실에서 본 한강다리, 아내와 여행하다 본 하늘과 맞닿은 제주바다 등 내가 본 것들이 나중에 에스키스를 통해 작품에 투영됐다"라며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작품에 한꺼번에 털어놓는 나는 세탁기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양의 미니멀리즘 작품은 검거나 희거나 식의 이원론적 출발점에 있지만 한국 작품은 백자처럼 희끄무레하거나 그을린 아궁이처럼 거무스레하다"라며 "한국의 단색화는 비워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정신적 깊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단색화의 시대 저항성에 대해서는 "정치적 고려를 한 적은 없었으나 작품에는 시대가 반영되기 마련"이라 덧붙였다.
단색화의 부상과 함께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는 지난해 11월 파리 페로탱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성공리에 열었다. 페로탱은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등을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화랑이다. 게다가 구겐하임, 스미소니언 내 허쉬혼국립미술관 등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달 아트바젤 홍콩과 소더비의 단색화 전에 이어 5월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이 예정돼 작가는 또 한번 도약을 앞두고 있다. (02)732-35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