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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복지 가져다주는 정부
비민주적이더라도 선호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에 포획
'전지구적' 민주주의 논의해야
관용 시민문화 등 성숙도 중요
"세월호 참사는 한국의 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명백하게 보여준 사례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로 대우할 수 있도록 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발전이 절실하다." 6·4지방선거가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여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던 만큼 결과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서울경제신문은 이번 선거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되짚어보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민주주의 연구 및 평가지표 개발을 목적으로 한 '좋은 민주주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은 김비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와의 대담을 8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선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주주의 역풍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의미에서도 효과적인 체제라는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한국은 형식 민주주의는 갖췄지만 여전히 국민 개개인의 안정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는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두 전문가는 최근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후퇴와 관련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및 남유럽발(發) 재정위기가 중요한 계기가 됐고 이 같은 선진국의 위기가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며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헌신이 약한 신흥국의 후퇴로 연결됐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두 연구자의 대담 내용 요약분.
-이번 6·4지방선거에 대한 얘기부터 해보자.
△강명세 수석연구위원(강)=세월호 참사가 생각보다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여전히 지역주의의 벽이 공고하다는 것이 확인됐다. 다만 충청권이 모두 야권으로 채워졌다는 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의 정국운영에서 충청 민심이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김비환 교수(김)=여야 누구도 압승했다고 보기 어려운 결과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야권에 상당한 프리미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의외로 여야 균형이 이뤄졌다. 또 하나는 (강 위원의 설명처럼) 전통적 지역주의 구도가 재연되기는 했지만 호남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무소속이 대거 당선된 점이나 부산·대구에서 야권이 매우 의미 있는 득표를 한 점 등은 지역정치 구도를 탈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차제에 지역구도를 완화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필요하다.
-지역주의는 한국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김=한국의 민주화는 국민들의 저항으로 지배 엘리트들이 마지못해 수용한 케이스다.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없이 민주화가 진행된 것이다. 민주화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선거를 통한 권력위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위임민주주의(delegated democracy)라고 하는데 다수를 통해 위임된 권력이니 무엇을 해도 좋다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는 민주주의의 일부일 뿐이다. 다중의 통제를 가함으로써 책임 있는 정치를 유도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이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
좋은 정치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명백하게 보여준 사례다. 빠른 속도를 강조하며 소수가 앞장서고 대중을 따라오게 하겠다는 국정기조는 이제 중단돼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로 대우할 수 있는 의식과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
△강=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와 관련해 중요한 사건이 3당 합당이다. 민주화세력이 권위주의·군부세력과 결합해버림으로써 과거청산의 기회를 잃었다. 이후 이른바 1987년 체제 이후 양당제가 공고해졌고 지배층은 이를 끝으로 민주화와 관련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양보를 끝내 버렸다. 분단체제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북한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기조 확산으로) 최소한의 복지만 실현된 채 중단된 것도 안타까운 점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제왕적 성향이 강한 것도 문제다. 모든 권력이 견제와 균형 없이 청와대에 집중된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시선을 넓혀보자. 최근 태국의 쿠데타나 우크라이나 사태, 유럽연합(EU)에서의 극우세력 약진 등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후퇴가 나타나고 있다.
△김=우선 EU 사례의 경우 지난 금융·재정위기로 인한 장기적 경기침체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용에 따른 양극화 심화가 원인이다. 1대99의 사회에 대한 서민 다중의 불만이 고조된 한편 1970년대 이후 폭넓게 수용됐던 다문화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최근의 경제침체로 소수인종 문화집단에까지 돌아갈 수 있는 파이를 만들지 못하면서 극우세력이 발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미국 또한 2001년 9·11테러 이후 민주주의가 약화되고 형식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미디어 권력이 결탁해 오히려 민주주의를 '관리'하는 실정이다.
이른바 '제3의 물결'을 통해 민주화된 신흥국의 경우도 경기침체가 민주주의 퇴행 혹은 질적 후퇴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마지 못해 민주화를 수용했던 기득권 세력 및 정치 엘리트들이 현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등에 업고 오히려 과감한 권위주의 정치행태를 과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이들 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이 약해 약간의 경제성장과 복지증진을 이루는 정부라면 비민주적이라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 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렸다가 마지못해 민주주의를 도입한 세력들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신흥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강=경제위기는 정치변화의 변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곧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위기를 기존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핸들링하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번 EU 의회선거에서 극우 정당이 제1당에 올라 충격을 준 프랑스의 경우 현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정부의 실정 탓이 컸다. 반면 아시아 등 신흥국의 민주주의 후퇴는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다. 민주주의가 한번 달성되면 꾸준히 발전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민주주의는 언제든 역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태국이 대표적 사례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것이 민주주의 퇴행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쓴 '21세기 자본론'이 화제인데.
△김=성장의 속도보다 자본의 이익이 더욱 빨리 증가하면서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게 피케티의 논리다. 비교정치학의 가장 오래된 명제 중 하나가 '경제성장이 민주화를 자극·촉진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중산층의 성장을 초래해 민주주의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인데 피케티가 말한 양극화 심화는 중산층의 몰락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침식시킬 우려가 있다.
△강=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과 비슷한데 최근에는 '민주주의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돈을 모으겠다'는 인센티브, 즉 재산권이 확립돼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정치적 기반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김=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새 명제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사회적 자본 이론이다. 민주주의는 부정부패를 막고 투명성을 담보해 경제정책의 합리성을 높이고 외자유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준다. 즉 민주주의는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을 산출하고 공고히 해줌으로써 경제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글로벌 민주주의 후퇴의 이면에는 미국·유럽의 리더십 부재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강=냉전 종식을 놓고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정치학자는 '역사의 종말'로까지 규정했는데 이와 반대로 신냉전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가 재등장하는가 하면 중국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독재정치를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을 보면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시장경제를 발판으로 성장하고 그 자본으로 독재를 하는 게 중국이다. 그러나 최근 중산층이 많아지고 있는 중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커질 텐데 현재 상태로는 유지가 힘들 것이다.
△김=금융위기와 재정위기가 국익에 우선 관심을 갖도록 함으로써 선진국들에 민주주의의 증진이라는 대의를 이차적 관심사로 후퇴시키고 있다. 자기 나라 경제가 위기를 맞았는데 다른 국가를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중국이 인권을 주제로 미국을 공격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준(準) 차르(황제) 체제'로 되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보면 (앞서 말했던) '경제성장이 정치 민주화를 자극한다'는 가설은 '경제성장이 반드시 민주화를 촉진하지는 않고 단지 이미 수립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고도의 경제성장이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과 자신감을 높여줌으로써 민주화를 지연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두 나라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풍이 불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중요한 가치인 것 같다. 현재의 민주주의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김=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존엄성을 담보한다는 측면에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런 본원적 가치 말고도 도구적 측면, 즉 민주주의를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착취·억압·지배 등 여러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물론 이 두 가치가 부딪힐 때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민주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존엄성을 유지해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서도 효과적인 정치체제임은 부인할 수 없다.
△강=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반값등록금이나 노인연금 문제 등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세대들이 누렸던 번영의 시대가 끝나고 경제침체가 계속되면서 유권자들의 권리 찾기가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는 이런 욕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고착된 양당제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개헌이나 제도개선 논의를 공론화할 시점이 됐다.
△김=전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와 맞닿아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 전 지구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에 민주주의가 포획돼버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지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글로벌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본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또 제도보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민문화의 성숙이다. 관용이나 공존공영의 태도, 상호존중의 정신 등 시민문화가 함께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보완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 과거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은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완벽히 성취할 수는 없지만 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상이다."
강명세 위원
△고려대 철학과 졸업 △고려대 정치외교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UCLA) 정치학 박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EU센터 연구교수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현재 국회의원연구단체 평가위원장,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
김비환 교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영국 케임브리지대 사회정치학 석박사 △성균관대 정치외교학 박사 △한국정치사상학회 편집이사 △한국정치사상학회 연구이사 △한국정치학회 이사 △현재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치사상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