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독일월드컵 16강 진출에 탈락한 후 허전해 하는 사람이 많다. 말로는 일상 속으로 돌아가자면서도 여진(餘震)처럼 보이지 않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갑갑함도 한몫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 월드컵 열기가 떠난 자리에는 장기불황에 대한 우려가 밀려오고 있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이미 장기불황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공무원과 교사 등 철밥통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도박산업이나 복권사업이 성행하는 것은 장기불황의 대표적 현상이다. 결혼연령이 높아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 역시 장기불황의 전주곡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불황국면은 총수요가 부족한 데서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총수요는 기업의 투자수요와 개인의 소비수요를 합한 것이다. 기업이 투자를 꺼리고 개인도 소비를 억제하면 장기불황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지나친 기업규제와 노동시장의 경직성, 부동산 버블과 사교육비 증가에 따른 가계의 지출구조 악화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다. 환율과 유가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출은 더 이상 우리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 못한다.
먹고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겹고 버거운 일이다. 최근의 잦은 부부싸움과 높은 이혼율이 이를 반증한다. 이번 5ㆍ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가장 큰 요인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집권세력은 ‘경제는 잘하고 있는데 민생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특히 민생이 고달픈 이유는 IMF에 의한 후유증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변명 아니면 무지의 소치다.
참여정부는 경제로 비교우위를 확보해본 적이 없다. 개혁이 선행돼야 경제성장도 가능하다는 오만한 논리로 경제실정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데 전력했을 뿐이다. 그나마 개혁도 운동권식 투쟁 의제가 태반이다. 최근의 ‘양극화’ 의제 역시 정치적 계산을 염두에 둔 편가르기에 불과해 보인다.
무지와 오만은 불신을 낳는다. 불신이 생기면 어떤 정책도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장기불황 조짐이 보이는 요즘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불신이라는 장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