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지방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가느다란 다리. 매끄럽고 탄탄한 복부…. 걸음마다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소녀 알리스. 이 완벽한 미모의 알리스가 왜 소시지로 변했을까.
한 순진무구한 소녀가 처절하게 파멸해 가는 과정을 통해 남성 위주 사회 안의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을 우화처럼 풀어낸 프랑스 작가 소피 자베의 '알리스와 소시지'(노블마인 펴냄)가 번역, 출간됐다.
예쁘고 친절한 소녀 알리스는 빼어난 미모로 어디서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존재다. 가톨릭 재단의 여학교를 졸업했고 졸업한 뒤에도 수도회 소속의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는 무척 얌전한 소녀다.
탱탱하고 윤기나는 피부를 위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피부 미용에 공을 들이는 알리스. 거울을 보고 있는 자신도 감탄하는 아름다운 미모는 '언젠가 나타날 왕자님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가 존경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는 오직 아버지. 심각한 '파더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알리스는 아버지의 '너는 예쁘지 않다. 고로 남자들에게 친절해져야한다'는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여자, 여자, 여자들이란……. 내 딸아, 넌 마릴린 먼로가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기억해두렴. 친절한 여자가 돼야해. (중략) 그래 아주 잘해줘야 해. 넌 여자니까, 예쁘든지 다정하든지 둘 중 하나는 돼야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알겠니?"
'남자들에게 친절하라'는 말의 의미는 뭘까. 고민 끝에 알리스가 내린 결론은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 알리스는 이제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떤 남자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의 지상 과제는 '남자들을 기쁘게 하는 것'.
알리스는 이제 외출도 하지 않는다. 알리스의 자취방은 남성들을 기쁘게 만드는 장소로 변했다. 신기한 것은 남성들에게 '친절'할수록 식욕이 엄청나게 왕성해졌다는 점. 그러나 알리스가 뚱뚱해질수록 반대로 남성들의 발길은 뜸해졌다.
결국 플라비오 형제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리스를 찾지 않게 된 어느날. 플라비오 형제는 알리스에게 맛있는 소시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집안 어디에도 소시지는 없다. 가는 허벅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알리스는 이제 자신의 몸을 먹음직스러운 소시지로 만들기 위해 다시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데….
미모와 친절함이 여성을 판단하는 최고 기준으로 작용하곤 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선택의 폭이 너무 한정돼 있다는 주제 의식은 페미니즘 문학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개념을 극단까지 끌어올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스토리로 꿰어낸 작가의 능력은 남성주의 사회 비판이라는 '진부한'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세진 옮김. 152쪽. 8천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