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브러더스에는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없다던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미국 최대 보험사인 AIG에 85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입장을 바꾼 것은 AIG가 파산할 경우 금융시장은 물론 세계 경제 전반에 메가톤급 파장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자산규모 1조1,000억달러로 전세계 130개국에 7,400만명의 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AIG의 덩치도 매머드급인데다 보험 산업의 특성상 실물경제와 직접 연결돼 있어 FRB도 ‘구제금융 투입불가’라는 원칙만 고수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AIG에 노출된 미국ㆍ유럽ㆍ아시아 금융회사들의 자산 규모는 4,41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RBC캐피털마켓도 보고서를 통해 만약 AIG가 파산할 경우 금융산업의 손실은 1,800억달러에 이른다고 전망했다. 특히 AIG는 채권에 대한 부도위험을 줄일 수 있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를 여타 은행들과 투자기관에 판매했다. 만일 AIG가 파산할 경우 CDS를 보유한 다른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결국 미국 금융시스템의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주주의 손실과 종업원 해고로 끝날 뿐이라며 파산을 방치한 리먼브러더스의 전례를 따르기에는 AIG의 무게감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정부의 이런 입장은 이날 FRB가 AIG 구제에 나서면서 발표한 성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FRB는 “AIG의 몰락은 이미 심각한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더 악화하고 자금조달 비용을 크게 높이는데다 가계 자산을 감소시켜 경제를 더욱 위축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보험회사가 파산할 경우 사회적 안전장치가 왜곡되고 정치적으로 비화될 소지도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FRB 의장이 해리 레이드 상원의원(민주)과 AIG 구제 방안을 협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AIG는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스탠더드앤푸어스(S&P) 등이 유동성 부족을 이유로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하면서 시장에서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길이 봉쇄된 상태였다. 더구나 골드만삭스ㆍJP모건 등 월가 금융기관들도 AIG 지원에 난색을 표명했다. AIG로서는 유일한 생명줄인 정부의 구제 금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서는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완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이번 조치를 반겼다. UBS의 데이비드 하벤스 애널리스트는 “AIG가 파산할 경우 경제 전반에 시스템 위기를 불러 그 파급 효과를 예측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며 “실로 엄청난 구제”라고 평가했다. 민주당의 찰스 슈머 상원위원도 “정부가 유례없는 단계를 밟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유례없는 시기에 놓여 있다”며 AIG 구제가 최상의 선택임을 시사했다. 하지만 AIG 구제는 도덕적 해이 문제와 더불어 리먼브러더스 몰락과 비교해 형평성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정부로서는 ‘민간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 불가’라는 원칙을 며칠 만에 무너뜨린 꼴이 됐다. 워싱턴뮤추얼 등 금융기관의 위기가 여전하고 자동차 업계가 구제금융 투입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일관적이지 못한 입장 변경은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