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그리스 총선 결과는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 채권단의 요구에 허리띠를 졸라맨 국민들이 오히려 가중되기만 하는 생활고에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Grexit)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차기 총리가 확정적인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당수가 트로이카의 긴축을 "과거의 것"으로 천명한 가운데 당장 26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무장관회의에서 이 문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루카스 추칼리스 경제학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 국민들은 정치적으로 적절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있으며 모두 화가 나 있거나 희망을 잃은 상태"라며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다'는 체념이 이번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디폴트(채무불이행) 이후 그리스는 채권단의 감시 아래 긴축 프로그램을 단행했다. 그 결과 2010년 국가 경제규모(GDP 기준) 대비 10.9%에 달했던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1.6% 수준까지 떨어졌다. 세계은행이 평가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는 이 기간 109위에서 61위로 뛰어올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8~2013년 제품 생산 규제가 가장 많이 개선된 나라로 그리스를 꼽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지표의 개선이 국민들의 체감경기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지난해 그리스의 실업률은 26.4%로 4년 전에 비해 두 배 넘게 뛰었고 임금은 평균 30%나 삭감됐다. 특히 50%가 넘는 청년 실업률은 긴축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그리스인들의 좌절을 나타내는 상징적 수치가 됐다.
이번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시리자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치프라스 당수는 선거 기간에 "국민의 존엄을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며 그리스인들의 반긴축 정서를 자극했고 이날 승리 연설에서 곧바로 긴축정책 폐기 및 트로이카와의 재협상을 선언했다.
하지만 치프라스 당수의 앞날은 만만치 않다. 당장 다음달 28일 만료되는 그리스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연장하지 못하면 2010년의 디폴트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 오는 3월 만기 예정인 부채 43억유로, 7·8월의 65억유로 등 내년까지 해결해야 할 부채규모가 280억유로(약 33조9,295억원)에 달한다. 그리스의 현 외환보유액 수준 등을 감안하면 구제금융 없이는 올 6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이와 함께 시장이 상정하고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즉 그렉시트가 현실화되는 것을 막으면서 채권단과의 재협상을 끌고 가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핌코의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블룸버그 기고에서 "긴축정책의 완화가 강력한 구조개혁과 함께 진행될 것이며 부채탕감도 협상의 테두리 안에서 질서 있게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시장에 확인시켜줘야 한다"며 "(전 브라질 대통령인) 룰라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장 26일 유로존 재무장관회의에서 그리스 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각된 가운데 그리스와의 재협상을 무조건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요한 반 오버트벨트 벨기에 재무장관은 '그렉시트'를 단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협상의 세부원칙에 대해 논의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고 지아니 피텔라 유럽의회 사회당그룹(S&D) 대표도 "재협상을 더 이상 터부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독일은 다른 채무국에 부정적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이유로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