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2월31일] 노예해방

1863년 1월1일.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이 효력을 발동한 이날 400만여명의 미국 흑인들은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노예해방의 공로는 링컨에게 돌아갔다. 과연 그는 노예해방론자였을까. 1858년 9월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 유세장. 링컨은 ‘백인과 흑인의 평등을 찬성한 적이 없다. 흑인의 선거권이나 배심권 부여, 공직 진출, 백인과의 결혼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연설했다. 관심은 오직 미합중국의 단합에 있었다. ‘노예제도를 존속해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노예를 해방해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또는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를 노예로 남겨 연방의 분단을 막을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트리뷴지 편집장에게 보낸 링컨의 편지다. 오히려 남부가 노예해방을 추진한 적도 있다.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동맹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남부의 독립을 공인해주면 자발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제안했었다. 로버트 리 장군은 흑인을 해방시켜 30만명을 징병하려고 시도했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은 고도의 정치ㆍ경제적 전략이었다. 노예주를 연방에 복귀시켜 남부의 사기를 꺾고 북군의 도덕적 우월성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남부경제의 근원인 흑인노예의 노동력을 와해시키자는 전략도 배경이다. 노예해방은 북부와 남부의 헤게모니 다툼의 부산물이지만 링컨은 노예해방자, 정직한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역사는 승자를 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일까. 오늘날 흑인의 인권과 자유는 150여년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비록 정략에서 결정되고 아직 차별이 남아 있지만 노예해방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한 위대한 발걸음이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역사는 진전한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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