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줄곧 꿈의 대상이었다. 토끼가 연자방아를 찧던…. 여름 밤 평상 위에 누워서 올려보곤 했던 그 달은 어쩌면 하늘이 아니라 우리 가슴 속에 있었다. 수천년 동안 우리는 그렇게 달을 보며 꿈으로 미래를 수놓았다.그러나 30년전 7월21일 새벽. 미국과 닐 암스트롱은 달의 신비를 여지없이 벗겨 놓고 말았다. TV를 통해 중계된 달은 꿈의 세계가 아니었다. 음침한 「죽음의 땅」. 그 위에 미국의 자존심(성조기)이 나부꼈다. 역사적 사건이지만, 또한 달의 신비가 무참히 벗겨진 사건이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은 사실 냉전의 유산이었다. 미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의 자존심 싸움이 없었던들 달은 여전히 「꿈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내딛기 전만 해도 우주과학 기술의 최강자는 러시아였다. 인류가 처음으로 우주에 인간을 보낸 건 61년 3월.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그 전에도 57년 세계 처음으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다. 당시 미국은 고작 15분 정도 우주공간을 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했을 뿐이다.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미국인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44세의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그해 5월. 케네디는 「스푸트니크 쇼크」로 짓밟힌 미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역사적인 발언을 한다. 『60년대가 가기 전에 달에 인간을 보내고 이들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 뒤 장장 8년간에 걸친 두 나라의 「달착륙 전쟁」이 이어졌다.
「아폴로」(미국)와 「루나」(러시아)의 대결로 표현되는 달착륙 전쟁은 초반부터 미국이 앞서갔다. 미국은 62년 달찰륙 계획(아폴로 계획)을 수립하고 대대적인 투자에 들어가지만 러시아는 책임자가 바뀌는 바람에 2년 뒤인 64년말에야 비슷한 계획을 수립했다. 출발부터 한 발 뒤처진 셈이다.
더욱 뚜렷하게 명암이 갈리기 시작한 것은 66년. 미국은 「제미니호」를 통해 달 착륙에 필요한 우주체류 기록(330시간)을 세웠다. 달궤도 진입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반면, 러시아는 「우주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갑자기 사망한다. 당연히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때부터 달 착륙 전쟁의 무게 중심이 미국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리고 끝내 승리의 여신은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69년 7월21일 새벽 5시 17분. 마침내 「아폴로 11호」가 달궤도에 진입하고 달착륙선인 「이글」이 암스트롱을 달 표면에 내려놓았다.
미국에도 시련은 있었다. 67년 아폴로 캡슐 지상 실험도중 3명이 사망했다. 러시아의 추격도 줄기찼다. 68년 무인 우주선을 달까지 보낸 뒤 지구로 환수하는 등 한 때 미국을 앞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막판 뒤집기는 암스트롱이 달에 안착하기 1주일 전인 69년 7월 13일 결국 좌절한다. 루나 15호가 달궤도에 진입했지만 착륙을 시도하다 달 표면과 충돌하며 부서지고 만 것.
암스트롱은 달에서 22㎏의 돌과 흙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명패를 남겼다. 『69년 7월 여기 지구에서 온 인간들이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는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왔다.』 참으로 미국다운 표현이다.
그 뒤에도 미국은 12명이 더 달에 갔고 그곳에서 골프도 치고 달자동차로 드라이브도 즐겼다. 러시아도 여러번 더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여기에다 총 24억달러를 들였고 러시아는 4억5,000만달러를 썼다.
정녕 암스트롱이 가져온 「죽음의 흙과 돌」로, 또 우주인들이 달의 영토를 짓밟은 것으로 「달의 몰락」은 확인된 것인가. 달을 향한 우리의 꿈과 환상은 이제 영원히 폐기해야 할까. 여름밤 다시 평상으로 나가보자. 그리고 고개들어 달을 한 번 더 올려 보자. /이균성 기자 GSLEE@SED.CO.KR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을 밟은 닐 암스트롱. 그 옆으로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다. 또 뒤에는 암스트롱을 아폴로 11호에서 실어 나른 달 착륙선 「이글」호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