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가동 중단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 부처 간 정책 혼선으로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 발표까지 취소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연출됐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31일 대국민 절전 호소 담화문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돌연 30일 오후11시10분께 총리의 담화문 발표를 전격 취소하겠다고 국무조정실이 밝혔다. 담화문 발표를 예고한 지 이틀 만에 나온 결정이어서 정부 내 의사결정 과정에 혼선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국무조정실의 공식 해명은 여름철 전력대란 우려의 단초인 원전 위조부품 사태를 먼저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담화문 발표 전날, 그것도 심야에 발표를 취소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석연치 않아 보인다. 정부 안팎에서는 애초 알려진 것보다 원전 비리가 더욱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 섣부른 담화보다는 철저한 원인 규명이 선행돼야 한다는 청와대의 의견이 국무조정실에 전달된 것이 취소 배경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정 총리 본인의 의중보다는 청와대의 ‘입김’이 더욱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총리의 담화 발표를 전격 취소할 수 있는 곳은 청와대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 측이 원전 부품 비리가 훨씬 심각한 것으로 보고 철저한 조사로 안전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담화문 발표를 보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측은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원전 문제에 대해 한 치의 의혹도 숨김 없이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원전안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고자 일단 담화를 보류한 것으로 안다”며 “청와대와 총리실이 이 부분에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특히 담화문을 발표하면 마치 국민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고통만 분담시키는 것으로 비쳐져 국민적 비판 여론이 확산되는 것을 청와대 측은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중심으로 곧 정부 자체조사가 잇따를 상황이라 비리 원인과 책임소재를 명확히 한 뒤 담화를 발표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여름철에는 전력에 여유가 없다는 점에서 예정대로 절전 호소 담화문을 내고 나중에 조사 결과가 나올 때 대국민 사과를 해도 되는데 정부가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느라 혼선을 빚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국무총리의 담화문 발표를 생중계하기 위해 전날부터 정부세종청사에 중계차량을 대기시켰던 방송사들도 이날 국무조정실에 강하게 항의하는 해프닝도 연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