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산 원유 수입과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마련한 '한국ㆍ이란 간 원화결제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사실상 우리나라에 묶여 있던 이란 측 자금을 해외로 무단 반출한 기업가가 재판에 넘겨졌다. 원화결제시스템은 유엔안보리에서 대이란 제재가 결의된 후 무역거래 과정에서 달러 결제가 어려워지자 2010년 10월부터 시중은행에 개설한 이란 중앙은행(CBI)의 원화 계좌를 통해 한국과 이란의 수출입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는 시스템이다. 현재 이란과의 중계무역은 이러한 방법으로 결제할 수 없도록 금지돼 있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이성희 부장검사)는 24일 이란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사이의 중계무역을 가장해 CBI 명의의 기업은행 계좌에서 1조948억원을 인출해 해외 9개국의 제3자에게 불법 송금한 혐의(외국환거래법) 등으로 정모(73ㆍ미국 시민권자)씨를 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는 2011년 2월부터 7월까지 자신이 운영하는 A사를 통해 두바이 M사로부터 대리석을 구입해 이란 F사에 수출한 것처럼 위장하고 기업은행에 개설돼 있는 CBI 계좌에서 1조948억원을 부정 수령했다. 정 대표는 인출한 CBI 자금 가운데 1조700억원 상당을 미화나 유로화로 환전한 뒤 외환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이란 F사가 지정한 해외 9개국의 여러 계좌로 송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 결과 A사는 서울 잠실동 일대 소규모 사무실에 직원 1명만 고용한 상태라 1조원대의 거래를 할 만한 능력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자신이 허위 중계무역으로 챙긴 약 170억원의 커미션 가운데 107억원 가까이를 미국에 설립한 회사에 무단 반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아울러 정씨는 은행들이 위장 거래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100만원에 불과한 토르말린 원석을 298억원이 나가는 루비원석으로 속여 이란 자금 수령을 재차 시도했지만 세관 감정 단계에서 가짜로 드러나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정씨가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과 거래를 하기 위해 정부의 행정적 절차를 속였다고 판단했다.
중계무역을 정상 거래로 위장하기 위해 정씨가 해외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대리석과 샹들리에 사진파일을 출력, 편집해 전략물자관리원에 제출한 정황이 검찰이 꼽은 유력한 정황증거다. 이 뿐만 아니라 수조원에 달하는 굵직한 무역거래에서 당초 석유화학제품으로 품목을 정했다 해당 품목이 한국무역협회에서 지정한 대이란 교역과 투자가이드라인에서 금지한 품목임을 알고 몇 시간 후 품목 자체를 변경한 행위도 위장 거래의 근거라고 검찰은 설명했다.
검찰 관계자는 "대이란 무역거래에 대한 허가권이 있는 한국은행과 전략물자관리원과 기업은행 등 우리나라 정부와 금융기관은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업무를 진행했다"며 한ㆍ이란 원화결제시스템을 악용한 개인적 범행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엔 등에서 대이란 제재를 사실상 우리나라가 도와준 것 아니냐며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사건을 덮는 것보다는 오히려 정씨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란 정부의 지급지시서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번 범행에 이란 정부 혹은 이란 측 인사가 깊숙이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강하게 일고 있다.
검찰 측도 "강한 의심은 있지만 수사권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F사와 관련된 이란 측 인사가 자금을 보낼 계좌를 지정하고 정 대표는 이에 따랐다는 점이 근거"라고 설명했다. 이란이나 UAE 모두 우리나라와 사법공조 체계가 짜여 있지 않은 국가들이다. 다만 정 대표는 허위 중계무역 혐의는 물론 이란 측과 짜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