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아메리칸 타임

한미 과학기술자대회 참석차 미국을 다녀왔다. 워싱턴에서 열렸던 행사가 끝난 뒤에는 8월 9일부터 11일까지 이틀간의 여름휴가를 동생 집에서 보냈다. 동생은 야구왕 베이브 루스의 고향이기도 한 대서양 연안의 도시 볼티모어에 살고 있다. 동생과 헤어져 워싱턴 근교의 달라스 국제공항까지 기차를 타고 가게 됐다. 볼티모어에서 공항까지는 차로 2시간이 걸리는데 비행기 시간에 대려면 아무래도 기차가 가장 빠를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표를 예약한 후 기차를 타기 위해 에버딘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전 8시 32분에 도착하기로 한 기차가 30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흔한 안내방송 한 번 나오지 않았다. 9시가 지나자 슬슬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가는 비행기 시간을 놓칠 수도 있겠다 싶어 역무원에게 물어봤더니 기다려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예전 우리 사회에서는 코리안 타임이 종종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약속시간에 늦거나 아예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간관념을 빗댄 용어였다. 처음부터 정확한 시간을 못 박지 않고 ‘점심 때 쯤’ 혹은 ‘저녁나절’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약속시간을 잡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코리안 타임은 이제 옛말이 됐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생소한 용어가 됐을 만큼 사회시스템 전체가 시간관념에 철저해졌다. 기차시간만 하더라도 10분 이상 늦는 경우도 좀처럼 없지만 늦어질 경우에는 전광판에 미리 연착시간을 알려 탑승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보통신기술을 발전시켜 잘 활용하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간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살펴보면 효율성이 크게 떨어져 있다. 공항 검색의 경우에도 전 세계 공항 중 미국만큼 쓸데 없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드는 나라도 없는 것 같다. 기차는 9시 10분이 돼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워싱턴 D.C.의 유니온 역에서 10시에 출발하는 공항 셔틀버스는 놓치고 말았다. 택시를 타 늦지는 않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30분 이상 초조해야 했던 그 시간은 보상 받을 길이 없다. 이제 미국의 기차 시간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부정적인 기억을 갖게 됐다. 남의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인식을 속히 바꾸지 않는다면 ‘아메리칸 타임’의 오명은 씻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 때 미 최고의 교통수단이던 기차의 가장 큰 미덕은 시간 엄수에 있다. 비록 자동차와 비행기에 그 자리를 내줬지만 그나마 남은 이용객들마저 멀어지게 만드는 아메리칸 타임의 비효율성은 불쾌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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