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1496> 토이토부르크 전투


서기 9년 9월9일, 토이토부르크. 3만명의 로마군단이 1만여 게르만족과 맞붙었다. 병력과 장비의 질과 양에서 압도적이었던 로마군은 사흘간 이어진 전투에서 무참하게 깨졌다. '야만족'으로 여겼던 게르만족의 원시적 도끼와 몽둥이에 사령관 바루스를 비롯해 2만여명이 전사했다. 군단의 독수리 깃발 3개도 빼앗겼다. 시내의 벽돌건물을 모두 대리석으로 바꿨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아래 전성기를 질주하던 로마는 왜 졌을까. 지휘관의 무능과 게르만족의 단결 때문이다. 쏟아진 폭우도 가죽 방패와 갑옷을 적시고 진흙 수렁을 만들어 로마군의 기동력을 떨어뜨렸다. 게르만족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아르미니우스(당시 27세)의 용병술.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인질로 잡혀가 로마군에 복무하며 전공을 세워 시민권과 하급귀족 직위까지 얻었던 그는 게르마니아로 돌아와 6개 부족의 전사를 모은 후 로마군을 숲으로 끌어들여 대승을 이끌어냈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 패배 이후 로마는 보복에 나섰으나 토이토부르크 전투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정도의 성과를 얻는 데 그쳤다. 라인강 동쪽 게르마니아를 '야만인의 땅'이라며 남겨두게 된 로마의 패배는 서양사의 흐름을 갈랐다. 로마가 승리했다면 기독교 성립과 영어 탄생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독일식으로 '헤르만'으로 불린 아르미니우스는 왕국을 세우지 못하고 내전에서 죽었지만 19세기 이후 영웅으로 부각되며 통일과 대외전쟁 등에서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승전 2,000주년을 맞아 거국적 축제라도 일어날 법한 독일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전쟁을 일으켰던 국가가 민족주의의 상징을 추앙하기 거북하다는 이유에서다. 평화헌법 뒤에 숨어 전범을 대놓고 추도하는 우리네 이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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