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0월30일] 앙리 뒤낭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인근 교회. 포로인 적국의 군의관이 승전국의 위생병과 의대생을 이끌고 수술에 나섰다. 시민들은 모든 부상병을 돌봤다. 당시에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이다. 어제까지도 싸우고 죽이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은 인물은 앙리 뒤낭(Henry Durant). 스위스 태생의 31세의 청년실업가인 뒤낭이 전쟁 한복판에 온 이유는 사업상 청원 때문. 알제리 일대 사막 녹지화 사업이 난관에 부딪치자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하려고 프랑스ㆍ사르디니아(이탈리아)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간 전투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전장에서 4만명의 사상자를 직접 본 그는 사업을 잊고 부상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로 찾아가 동조자를 구하고 예배보다 부상자들을 돌봐달라고 부르짖었다. 부상자들이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동등하게 치료받은 것도 이 때가 처음이다. 뒤낭이 당시의 체험을 소개한 ‘솔페리노의 회상’은 전세계 언어로 번역되며 ‘인류는 모두 형제자매’라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국제적십자가 창설(1863년)되고 최초의 제네바협약이 체결(1864년)된 것도 뒤낭의 저술과 평화운동 덕이다. 뒤낭은 알제리 사업 실패로 파산(1867년)하고 파벌 싸움에 휩쓸려 국제적십자사의 총재직에서도 쫓겨나 궁핍 속에서 살았지만 1901년 1회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공로를 인정받았다. 뒤낭은 1910년 10월30일,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따라 한마리 짐승처럼 무덤에 가겠다며 일체 장례행사를 거부한 채 82세로 죽었다. 뒤낭의 존재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조국 스위스. ‘스위스=평화’라는 인식이 뒤낭 덕에 굳어졌다. 스위스 주요도시에 국제기구가 들어서 사람과 달러를 끌어들이게 된 시발점도 적십자사와 제네바회의 시리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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