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날을 앞둔 요즘, 통신업체에 다니는 김모씨는 고향 내려갈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자신에게 할당된 휴대폰 30대를 설연휴 때 친척들에게 모두 팔아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렇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부탁을 해왔던 터라 이제는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조차 없다. 그저 인사평가를 앞세워 하루종일 자신과 직장동료들을 볶아대는 번호이동성제가 미울 따름이다.
자신의 번호를 그대로 가지고 통신회사만 바꿀 수 있는 휴대폰 번호이동성 시대를 맞아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오고 있다. 업체마다 사활을 걸고 가입자 유치에 열을 올리다 보니 임직원들을 총동원하고 음성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변칙ㆍ부당영업이 판치고 있다.
일반 소비자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갖가지 요금제와 공짜 휴대폰이 부풀려 알려지고 툭하면 전산사고까지 터지는 통에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공짜폰이라는 말에 솔깃해 계약금을 건넸다가 막판에 줄행랑을 치는 사기피해를 당해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도 있다. 또 자신도 모르게 가입회사가 엉뚱한 곳으로 변경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올해 번호이동 특수에 잔뜩 기대를 걸었던 대리점들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고객들은 왜 값싸게 팔지 않느냐며 항의를 퍼붓고 공식 판매망을 제쳐놓은 채 음성적인 판매까지 공공연히 벌어져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쯤 되면 과연 누구를 위한 번호이동성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만하다. 소비자의 편의를 확대하겠다는 도입취지는 뒷전으로 미뤄진 채 시장은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통업체들은 말로는 `클린 마케팅`이나 `시장 감시단`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하나같이 구두선에 그칠 뿐이다. 업체간에 제소ㆍ고소가 러시를 이루는가 하면 급기야 형사고발이라는 최악의 사태로까지 번지고 있다. 지나친 출혈경쟁에 따른 수익성 악화를 뻔히 알면서도 벼랑 끝 전술에만 매달려 있다.
번호이동성제가 제대로 정착돼야만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보장되고 국내 통신시장이 한단계 성숙된 단계로 도약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제라도 차분하게 시장을 되돌아보고 모두에게 득이 되는 공정경쟁의 틀을 되살리기를 기대해본다.
<정상범<정보과학부 차장> ssa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