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이끄는 50인의 경영인]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

"사람관리가 기업 바꾼다" 감성경영 중시
취임 첫해 1조6,000억 영업이익
지주사출범등 굵직한 현안 처리도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한 번 신헌철을 알면 영원한 ‘신헌철 맨’이 된다”는 말을 한다. 국내 최대 정유회사를 이끄는 수장의 리더십에는 강인함과 동시에 따뜻함, 그리고 진정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지인들은 신헌철 부회장을 ‘외유내강’형의 최고경영자(CEO)로 평가한다. 신 부회장은 기업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 부회장은 SK의 경영철학인 ‘SKMS’를 실천하기 위해 ‘감성경영’을 중시한다. 구성원의 감성을 잘 다스려주고 신뢰로써 대하면 모든 구성원들이 자발적이고 의욕적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업이 사람의 삶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겸손하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신 부회장은 이를 위해 구성원들이 자발적이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경영의 1순위라고 여기고 있다. 이에 대표이사 취임 이후 모범이 되는 사원을 찾아서 칭찬과 격려를 통해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용기를 주는 ‘입의 방문’, CEO가 편지를 써서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는 ‘손의 방문’, 현장경영을 통해 상대가 어려울 때에 찾아가는 ‘발의 방문’을 실천하고 있다. 신 부회장은 감성을 중시하나 일에 있어서는 열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SK㈜, SK가스 등을 떠나 1995년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생소한 사업 환경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아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일을 했다. 이 일화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신 부회장은 마라톤 경영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마라톤은 만나게 된 것은 지난 2001년 유니세프가 주최한 국제아동돕기 행사. 98년부터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던 그는 당시 행사장에서 마라톤 예찬론을 듣고서는 남산 순환도로를 달리기 시작했으며 그 해 10월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대회 풀코스 도전에 성공했다. 신 부회장의 이른바 ‘성실경영론’은 마라톤으로부터 얻어진 교훈에서 나온다. 마라톤에서 너무 욕심을 내고 달린 사람은 절대 결승점을 통과할 수 없으며 기업도 마라톤처럼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투자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SK에너지는 신 부회장이 대표이사를 맡은 이후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겪으면서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발전을 이뤘다. 신 부회장 부임 직전인 2003년 SK에너지는 13조8,000억원의 매출과 6,713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으나 경상손실로 15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는 데 그쳤다. 그러나 신 부회장이 대표이사가 된 첫 해엔 17조4,061억원의 매출과 1조6,205억원의 영업이익이라는 놀랄만한 성과를 거뒀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2007년에는 매출 27조7,919억원과 영업이익 1조4,844억원을 올렸다. 이밖에 인천정유 인수, 지주회사 출범, 이사회 중심경영 강화 등 굵직굵직한 이슈들을 훌륭히 진행시켜 왔다. 특히 신 부회장은 지속적인 해외사업 강화를 통해 2007년에는 수출액이 전체 매출의 54% 수준인 160억달러를 돌파했다. 이제 신 부회장은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 수출기업으로 자리잡은 SK에너지의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신헌철 부회장은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은 지난 45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부산 해운대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어려운 가정을 꾸려나갔다. 미군이 주는 초콜릿과 껌을 얻기 위해 교회를 다니기도 했다. 신 부회장은 은행원이 돼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지만 '성적이 아까우니 대학에 가라'는 주변의 권유 때문에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합격운이 없었다. 결국 3수끝에 부산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군대는 해병대를 갔는데 제대를 4개월 앞둔 68년 1월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8개월을 연장 복무해야 했다. 신 부회장은 "이런 경험들을 통해 기다리고 인내하며 겸손해 하는 삶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직장생활은 SK에너지의 전신인 대한석유공사에서 72년 시작했다. 판매기획과에서 과ㆍ차장 시절을 보내고 사장실 영업담당 팀장, 경영기법개발부 부장 등을 거쳤다. 이후 SK가스로 옮겨 영업담당 상무, SK텔레콤 전무, SK가스 대표이사를 지낸 뒤 2004년부터 SK에너지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1945년 경북 포항 출생 ▦1972년 부산대 경영학과 졸업 ▦1972년 유공 입사 ▦1995~98년 SK텔레콤 상무ㆍ전무 ▦1998~2002 SK텔링크 사장 ▦2002~2004 SK가스 사장 ◇경영원칙 ▦사람관리가 기업을 바꾼다-구성원의 감성을 다스리고 신뢰로써 대해야 ▦의욕적인 업무환경을 만들자-임직원 대상 '입의 방문'(격려 메시지) '손의 방문'(편지) '발의 방문'(현장 독려) 실천 ▦경영은 마라톤이다-욕심내면 결승점에 이르지 못하며 철저한 계획과 훈련이 필요 1981년 호남정유와의 '300일 전쟁'
정유업계 전설로 지금도 회자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은 30년 넘게 에너지 업계에 종사한 경영인답게 업무와 관련해 상당히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런 일화들은 신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신헌철 부회장이 SK에너지(당시 유공)에 입사해 처음 맡은 업무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규 주유소 부지를 물색하는 일. 입사 1년 후인 73년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해인사 주유소 개발권 경쟁에 투입됐다. 정유 4사 직원들은 스님들을 찾아 큰 절을 올리며 접전을 벌였다. 신 부회장은 온갖 노력끝에 사업권을 따내고 사내 소식지 '유공 스탠드'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우릉대고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다지만 하나의 폴사인을 얻어내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의 노력들이 개업식날 휘날리는 깃발 하나하나에 전설처럼 나부끼고 있다." 판매기획부장 대행 시절이었던 1981년 호남정유와의 소위 '3백일 전쟁'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정유업계의 전설 중 하나. 당시 유공은 첨가제 CX-3를 앞세운 호남정유의 공세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10% 포인트나 떨어지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신 부회장은 옥탄가 89짜리 보통 휘발유를 일선 주유소에서 모두 없애버리고 같은 가격에 94짜리 고급 휘발유를 공급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결국 유공은 밀리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으며 국내 정유시장은 고급 휘발유 시장으로 재편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지난 95년 신 부회장은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 수도권 마케팅본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은 시장독점으로 경쟁마인드가 형성돼 있지 않았고 신 부회장에게 통신업은 낯설었다. 신 부회장은 '기름쟁이'에서 정보기술(IT)맨으로 변신한 뒤 매일 새벽 2∼3시에 퇴근해 옷만 갈아 입고 아침 7시에 출근했다. 아예 1주일에 3∼4일은 사무실에 마련된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며 업무를 봤다. 이 같은 노력으로 96년 1월에 시작된 CDMA 가입자는 98년 700만명으로 증가했다. 95년 6,500억원이던 매출액은 96년 1조2,000억원, 97년 2조2,000억원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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