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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사방이 가로막힌 희고 작은 방에는 1인용 책상 세트 하나만이 동그라니 놓였다. 이곳은 필경사(筆耕士)의 방. 5개월에 걸친 전시기간 동안 한 사람당 한 시간씩, 총 1,000명이 릴레이로 책을 필사하는 ‘1,000명의 책’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 김승옥의 ‘무진 기행’ 등 국내외 문학작품이 필사의 대상이다. 필사본은 한정 부수로 인쇄돼 전시 종료 후 참가자들에 우편 발송될 예정이다.
어떤 원본이든 고스란히, 심지어 입체로까지 재현해낼 수 있는 지금, 전혀 새롭지도 않은 고전 작품을 손으로 베껴 쓰는 일은 쓸데없는 행위로 취급받기 딱 좋다. 그러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그 과정조차 무의미한 것일까. 안규철은 익명의 관객들이 이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수동적 구경꾼이 아닌 참가자가 되고,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지니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일시적으로나마 꾸리게 된다고 설명한다. 더구나 이 무위(無爲)의 작업으로 한정 부수의 필사본이라는 결과물까지 얻을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좋은가.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는 ‘1,000명의 책’을 포함해 음악, 영상, 퍼포먼스 등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총 8점을 만날 수 있다. 9월 15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