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명 감원불구 “또 감원” 선배의 말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보너스·수당도 ‘싹둑’ 아내·아이보기 민망/“기획해본지 언젠가” 마지막 담배끄며 한숨『가슴이 막힌다. 우울하다. 괴롭다.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스트레스 연속의 날들이다.』
98년 3월. 광고대행사인 A기획 사무실. 광고기획자 O차장(34)이 또다시 담배를 물었다. 벌써 두갑째. 지난해보다 한갑이나 늘었다. 요즘같은 초절약 시대엔 담배값도 아쉽지만 되는 일은 없어 담배 의존도만 높아졌다. 「IMF가 뭔지」. 그나마 추위가 지나가서 다행이다. 회사측이 경비절감 차원에서 실내온도를 내려 겨우내내 감기를 달고 지냈다. 약값도 쏠쏠했다.
그러나 곳곳에 빈 의자와 책상만이 뎅그라니 놓인 사무실 분위기는 아직까지 썰렁하기만 하다. 연초에 회사가 생존차원에서 무려 1백여명에 가까운 직원들을 감원했기 때문이다. 지난해말 대량감원설이 사내에 돌때만해도 설마설마했는데 어느새 현실로 나타났다. 사장이하 임직원이 무슨일이 있더라도 우리만큼은 절대 감원이 없다며 직원들의 동요를 막았던 때가 엇그제 같았는데.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쩌랴. 나조차도 언제 짤릴 지 모르는 상황인데. 하루살이 처지라는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와 닿은 적도 없었다. 최근엔 2차 감원설마저 돌고 있다. 「1차때보다도 많다고 하다는데...」. 옆 사무실 선배가 걱정스럽게 내뱉은 말.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감원은 O차장 옆자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내에서 가장 절친했던 입사동기 K차장의 빈 자리는 볼수록 쓸쓸해 보였다. 자신대신에 나간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 고통분담 차원에서 월급은 20%나 깎였다. 연월차수당은 없어졌고, 복지비는 크게 줄었다. 야근수당이니 휴무수당이니 하는 말을 들어본 적도 아득하기만 하다. 차장이라는 직분때문에 보너스도 3백%를 반납해야 한다. 엄청나게 오른 물가를 생각하면 아내 보기가 미안할뿐이다. 석달전에 태어난 둘째 아이 분유값과 기저귀값도 부담스럽다.
대량감원은 했지만 회사 역시 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 광고주들이 너도나도 광고를 못하겠다고 선언했는가 하면 그나마 광고를 집행했던 광고주들 몇몇은 부도를 내버렸다. 회사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아마 광고회사 부도도 시간문제다.
요새 광고기획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일감이 없으니 당연하다. 아무 대책없이 쉬고 있는 것이다. 상사에게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그들도 똑같은 신세.
요즘처럼 광고계에 입문한 것을 후회해 본 적도 없다.
「정말 신명나게 광고를 만들고 평가받고 싶다」. 마지막 담배를 끈 O차장의 처절한 기원이었다.<홍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