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일관계에서 '우리 문제' 성찰하기

박광준 일본 붓쿄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박광준 교수


만약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이나 중국과 대립을 필요 이상으로 조장하고 역사 문제에 관련된 우리의 상처를 덧나게 해온 지금까지의 태도를 하루아침에 바꿔, 위안부 문제에 관해 한국민에게 사죄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겠노라고 약속한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본이 사죄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실익이 당장 생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아마도 '우리의 에너지를 그렇게도 소모했던 요구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라며 '허탈감'을 느끼는 국민이 오히려 많지 않을까. 정부는 또 어떨까.

이렇게 부질없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정부 역시 눈앞의 사죄 요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한일관계에 관한 보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를 잊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십수개월 전 일본의 유력 잡지 '주간문춘'은 아베 총리가 한중일 관계를 언급하면서 "그나마 중국은 외교게임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은 대화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감정적이고 어리석다"고 한 발언을 보도한 적이 있다. 비록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보도내용을 부인했지만 한국민의 입장에서 봐도 우리 정부가 오히려 국민들보다도 더욱 감정적인 태도로 외교에 임하는 장면이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그 보도가 늘 마음에 걸린다.

對日 장기 전략목표 있는지 의문

사죄요구라는 메시지는 본질이 대화이고 대화란 상대방의 변화를 기대한 행동이다. 식민지배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우리로서 일본의 행보를 경계하고 과거사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 메시지가 일본 정부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관심을 일본이 태도를 바꾸는가 아닌가에 집중시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일본에 대한 관심 과다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무관심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한일관계 모습에 관계없이 우리 사회를 보다 성숙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과제이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대화방식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거의 한국인의 본능이 되다시피 한 감정적인 일본 비난 풍조가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불행히도 그 영향은 부정적인 측면이 보다 큰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제 손으로 우리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므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문제를 우선 남 탓으로 돌리는 사회풍조는 그 부정적 영향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 우리 역사는 '남 탓의 역사'가 돼 있는데 그러한 사고방식이 상당 부분 한국인의 일상적 생활양식에 스며들고 있다. 한때 일어났던 '내 탓이오'라는 사회움직임이 퇴화하고 어떤 문제를 논의한 뒤에는 으레 '모든 것이 정치가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음을 체감한다. 이러한 풍조는 사회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찰을 요구하는 보다 성숙한 사회 만들기를 가로막고 있다. 이에 연결되는 문제이지만 과학적으로 수집된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정책 결정이 흔해진 것도 부정적 영향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대한 요구나 정책은 다소 불합리하거나 사실과 다르더라도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 풍조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아베 수상이 마지막 조선 총독의 손자라는 한 단체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그것을 큰 반성의 재료로 삼으려는 사회움직임은 없었다.

비난 집착 땐 성숙사회 건설 요원

방사능 오염을 이유로 한국은 후쿠시마 근처 8개현의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왔는데 일본은 최근 그것을 과학적인 근거 없이 한국 정부가 수산물의 무역장벽을 만든 것이라고 규정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그 수산물의 유해성 입증 책임을 한국 정부가 져야 한다고 하니 난처한 입장에 처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일본 수산물에 대한 불안을 감정적으로 조장한 것이 우리 어민이나 우리 수산업계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를 신중히 살피는 일이다. 막연한 불안감으로 소비자가 우리 수산물까지 기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 피해자는 바로 우리 수산업계가 아닌가. 일본에 대해 행한 행동이 우리 사회 내의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우리 사회의 건전성을 잠식할 수 있음을 우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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