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때에 머무른 순이, 행복한 여자죠

영화 '깡철이' 배우 김해숙씨
치매 걸려 철없는 엄마 역할 맡아 가난하고 아파도 고운 순이 그려


잘해도 티가 나지 않는 것이 엄마의 일이듯 엄마 역할은 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지만 역시 티가 잘 나지 않는다. 이제는 국민 엄마로 인정받는 배우 김해숙(58ㆍ사진)도 이 '티 나지 않는 역할'에 대한 딜레마에 때문에 힘이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깡철이'에서 치매에 걸려 철이 없어진, 아니 철을 잊은 엄마 역을 맡은 배우 김해숙을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에 머물러서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는 남편으로 알고 있는 순이는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난하고 아픈 그를 '오버'하거나 추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 챙이 큰 모자를 쓰고 잠자리 안경을 끼고 늘 치마만 입고 잠바가 아닌 케이프를 입고 다니는 '고운' 순이를 만들었어요." 깡철이 엄마 순이에 대한 김해숙의 설명이다. 김해숙은 적당한 모자를 고르기 위해 수십 개를 써봤고 옷 한 벌마다 가봉을 다섯 번 정도 해서 순이를 위한 의상을 준비했다고 한다.

언론시사회 이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김해숙은 눈물을 흘렸고 이것이 보도되자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눈물을 보인 이유에 대해 그는 "나이가 있다 보니 해야 하는 역할이 엄마로 한정된다"며 "(그래서) 늘 다르게 표현하려 노력하면서도 힘이 빠졌는데 이제야 여러분께서 잘한다고 해주시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고 털어놓으며 또 한번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어 "연기는 자판기에서 뽑아내듯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지킨 그 소신이 맞았다고 확인해준 것 같았다"며 "그렇게 인정받으니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받은 것보다 더 기뻤고 이제야 배우가 된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엄마에게 다양한 얼굴과 모습이 있듯 '국민 엄마' 김해숙도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면서 '엄마'에 대한 이미지의 스펙트럼을 늘리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나쁜 짓을 하는 '박쥐'의 엄마, '무방비의 도시'의 소매치기 엄마, '도둑들'의 '씹던 껌'은 제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특히 '무방비의 도시'를 찍으면서는 '헌신적인 엄마'라는 고정된 이미지 하나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연기를 잘못 했는지를 깨달았어요."

"영화 '깡철이'를 가족들이 함께 보고 웃고 그 웃음이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한 동의의 표시였으면 좋겠어요. 또 영화를 보고 '엄마에게 전화했다'라는 말도 듣고 싶어요. '깡철이'는 그렇게 따뜻한 영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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