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지난 3월6일 경기도 과천 정부청사의 법무부 2층 국제법무과. 열댓 명의 남성들이 이른 아침부터 국제법무과 앞 복도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성들은 한국 법률시장에 이제 막 노크를 시작한 한국계 미국 변호사들이었다. 이날은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앞두고 법무부가 국내 진출을 원하는 미국 법무법인(로펌)들로부터 예비심사 신청서를 받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신청서를 내고 법무부를 나서는 김병수(46) 셰퍼드멀린 한국사무소 대표 변호사. 기자가 다가가 소감을 묻자 그는 "국내 진출을 위해 준비를 많이 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8개월이 지난 지금 김 변호사는 이제 셰퍼드멀린 한국사무소 대표 변호사로 한국 법률시장에서 서서히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김 대표변호사는 법무부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영국계 메이저 로펌인 클리포드챈스와 미국계 대형 로펌 롭스앤그레이, 폴헤이스팅스 같은 경쟁사들보다 한발 먼저 치고 나가 8월 한국사무소를 가장 먼저 열었다. 사무소 문을 연 다음날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고객들이 사건 2개를 맡겼다. 한국에서 변호사로서의 첫 출발이다.
◇ '경제학도'에서 '법학도'로=김 대표변호사는 원래 경제학도였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84학번인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간 곳도 미국 텍사스 주립대 경영전문대학원(MBA) 회계학과다. 이곳에서 회계학을 공부하던 김 대표변호사는 세법 책을 펼 때마다 튀어나오는 세법 판례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사례만 갖고 공부하려니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김 대표변호사는 "이럴 거면 아예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며 "미국법을 계속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결정은 그의 인생 방향을 바꿔놓았다.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서 법학도가 됐지만 학업도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같은 유학생으로 만난 아내는 뱃속에 둘째를 가진 상황이었지만 집안 살림을 다 맡아야 했다. 김 대표변호사는 "이른 새벽에 공부하러 나가면서 집에 남아 있는 첫째 아들과 아내에게 미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공부는 자신 있었지만 마땅한 인맥은 없었다. '끈'을 잘 잡아 대형 로펌에 덜컥 취직하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김 대표변호사는 불확실한 미래에 초조해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지독한 학구열로 다잡았다.
하루 16시간 넘게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세스(Sethㆍ김 대표변호사의 미국이름)'는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벌레로 통했다. 김 대표변호사는 "교수가 수업 때 하는 이야기를 노트에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며 "나중에는 현지 친구들이 노트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더라"라고 은근한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일자리를 잡는 데도 다른 친구들보다 몇 갑절의 노력이 필요했다. 미국 로스쿨생들은 통상 2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에 로펌에서 인턴을 하는데 김 대표변호사는 인터뷰만 수십 군데를 보느라 집에도 못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그에게 기회를 준 곳은 미국 중부 시카고에 있는 한 로펌. 이곳은 로스쿨을 졸업한 1998년부터 3년 동안 김 대표변호사가 변호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했다.
◇고마운 '도널드(Donald)'=김 대표변호사는 시카고 로펌에서 은인 한 명을 만난다. 그보다 20살 가까이 많은 동유럽계 미국인 도널드 파슬카씨. 김 대표변호사의 '사수'였던 파슬카씨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경쟁에서 지기 싫어했다. 김 대표변호사는 그에 대해 "11명의 대가족 속에서 자라며 고생을 해서인지 경쟁심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파슬카씨는 깐깐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선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속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김 대표변호사는 파슬카씨와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일을 하는 법, 일을 잘 하는 법, 그리고 경쟁에서 지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그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시카고에서 한창 일할 무렵 김 대표변호사는 '3년차 위기'를 맞았다. 그는 "한국계 변호사들은 졸업하고 3년차가 되면 미국에 더 오래 있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유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계 변호사들은 한국 관련 일을 찾아 홍콩 로펌행을 택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실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변호사가 내 길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길게는 14시간씩 일하는 강행군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여기서 왜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하나, 나도 돌아가야 하나, 매일 밤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 남았다. 왜 남았냐고 묻자 김 대표변호사는 "미국에 온 것도, 변호사가 된 것도 남이 시킨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한 것"이라며 "승부수를 던져보자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여러 차례 김 대표변호사를 다독여준 파슬카씨의 조언 덕도 컸다. 그렇게 살아남기로 한 김 대표변호사는 2004년 세계 100대 로펌인 셰퍼드 멀린에 들어가 파트너 변호사가 됐다.
◇한국사무소는 전진기지가 아니다=국내 법률시장에 진출한 김 대표변호사의 각오는 남다르다. 그는 한국사무소를 그저 전진기지로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김 대표변호사는 "로펌이 제 역할을 하려면 인적자원이 최소 100명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야 공정거래ㆍ지적재산 등 다양한 분야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향후 사무소 규모를 확장해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의지다. 김 대표변호사는 "회사(셰퍼드멀린) 차원에서도 지원을 엄청나게 했고 나 역시 모든 것을 전력을 다하고 있다"며 "풀(Full)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셰퍼드멀린 한국사무소는 공정거래와 국제ㆍ금융 분야, 기업일반 및 파산과 구조조정 분야에 강점을 보인다고 김 대표변호사는 설명했다. 김 대표변호사는 상법과 은행 관련 분야 및 엔터테인먼트 법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엔터 분야는 김 대표변호사가 직접 담당한다.
'경쟁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묻자 김 대표변호사는 "경쟁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국 뉴욕이나 LA에 가보면 한 건물에 로펌이 4~5개 넘게 모여 있는 것이 부지기수여서 경쟁이 오히려 몸에 맞는다"며 "지금 심정이 3년차에 겪었던 위기와 똑같다. 승부수를 던질 때"라고 강조했다.
● 김 대표변호사는 ▦1966년 충남 논산 ▦1989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1994년 텍사스 주립대 회계학 석사 ▦1998년 조지 워싱턴대 법학 박사 ▦2004년 셰퍼드멀린 변호사 ▦2012년 셰퍼드멀린 한국사무소 대표변호사 |
■ 김 대표변호사의 희망사항 이제 막 한국 법률시장의 맛을 보기 시작한 김병수 대표변호사의 고민은 무엇일까. 그가 단번에 내놓은 답은 술이었다. 김 대표변호사는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며 "술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버티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또 "하루에 술 약속 3개가 잡히기라도 하면 어쩔 수 없이 하나만 골라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변호사는 미국 변호사 문화를 소개했다. 그는 "미국에서 '클라이언트 엔터테인먼트'는 주로 농구나 야구 같은 운동경기 관람과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각 지역마다 프로 스포츠 팀이 활성화돼 있다 보니 변호사와 고객이 어울려 좋아하는 운동 경기를 즐기면서 관계를 돈독히 해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경기를 보는 도중, 그리고 이후에 술이 곁들여지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는 아니라고 김 대표변호사는 설명했다. 주말에는 아무리 재미있는 경기가 있어도 변호사나 고객이나 모두 사절이란다. 그는 "한국은 딱 두 가지"라며 "술 아니면 골프로 정리된다"고 했다. 때문에 김 대표변호사는 요즘 다른 고객 만족 방법은 없는지 고민 중이다. 그는 "야외에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도 찾아보면 많을 것"이라며 "미국에 있을 때 아는 변호사가 보트를 탔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다"고 말했다. 보트는 비싼 것 아니냐고 묻자 김 대표변호사는 "렌트로 하면 생각보다 값이 저렴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변호사는 건강 관리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2005년부터 꾸준히 요가를 해왔다"며 지금은 수준급이라고 귀띔했다. 사교댄스는 '프로암(Pro-am)'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실력이다. 중학생ㆍ고등학생 두 아들의 아버지인 김 대표변호사는 "한국에 돌아온 뒤 아들들이 좋아하는 운동을 많이 하지 못했다"며 "수영을 좋아하는 둘째를 위해 일부러 경북 김천대에서 열린 수영대회에 참가해 응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